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수덕사 .. 대웅전만 보러 가야

문근영 2013. 7. 13. 07:13

                                수덕사 修德寺 ...대웅전만 보러 가자.                                      

                         

                

  

                                                                                                                            충청도 내포땅..가야산 남쪽 덕숭산(德崇山. 580m) 중턱에 널찍이 자리 잡은 수덕사는 백제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고려때 지은 대웅전이 건재하고, 조선 말기에는 경허(鏡虛)와 만공(萬空) 같은 큰 스님이 있었다.

 

 

 

수덕사의 창건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고,고려 공민왕시절 나옹(懶翁)이 중수했다고 전해 온다. 그러나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까지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이를 기준으로 건축사가들은 부석사 무량수전,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릉 객사문 등 고려시대 건축의 양식과 편년을 가름하고 있다고 한다.

 

 

 

 

 

 

 

 

 

                                              수덕사 창건설화

 

 

 

 

홍주 목사 고을에 수덕이라는 도령이 하나 있었다. 그는 양반집 아들로 의젓하게 살고 있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여  어느 해 가을에는 몸종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몸종들과 산을 둘러싸고 몸종들이 짐승을 몰아 사냥감이 나타나면 수덕이가 화살을 날리어 잡는 그러한 사냥이었다.

 

 

몸종들이 나뭇가지를 탁탁 털면서 " 우 ...."하고 몰아오더니 "노루야 노루야!"하고 소리쳤다. 수덕은 활에는 자신이 있었으므로, 언덕 아래 숨어서 활을 조이며 쳐다보고 있는데, 정말 송아지만한 노루가 자기 앞으로 껑충껑충 뛰어오고 있었다. 수덕은 급히 활시위를 잡아당겼다가 딱 멈추었다. 수덕이 어쩐 일인지 화살을 날리지 않고 멈추자, " 도련님 노루에요. 어서 화살을 날리세요 " 하고 몸종들이 아우성쳤지만, 수덕은 결국 활을 쏘지 못했다, 그는 노루가 뛰어올 때부터 그 방향에 어여쁜 낭자가 똑같이 뛰고 있었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수덕은 책을 펼쳐도 글이 보이지 않고, 그 낭자 얼굴만 떠올랐다. 그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자신을 아끼는 할아범 몸종에게 그 낭자를 찾아보라고 부탁하였다. 할아범은 여러 마을에 수소문한결과 바로 건너마을에 사는 덕숭이라는 낭자임을 알게 되었다. 덕숭낭자는 혼자 살고 있는 여인으로 그 아름다움이나 고운 마음씨가 온 동네에 소문이 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수덕이는 드디어 어느날 밤에 덕숭낭자의 집을 찾아가, 자기와의 결혼을 청하였지만, 덕숭낭자는 아직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하지만 수덕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결혼을 고집하였고, 이윽고 새벽닭이 울기 시작하였다. 덕숭낭자는 닭 울음소리에 따라 고개를 들어 얼굴을 세우고 수덕도령을  바라보며 말을 하였다. " 저와 결혼하고 싶으시면 먼저 소녀의 청을 들어주셔야 하겠습니다. 우리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세워주십시요"  수덕은 흔쾌하게 승낙하였다. 

 

 

 

 

 

 

 

 

날이 밝자 그날부터 수덕은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수덕은 많은 인부들을 동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서둘렀다. 드디어 절이 완성되어 수덕이는 덕숭낭자를 찾아가 절이 완공되었음을 아렸다. 그러자 낭자는 하는 말이 " 어째서 절을 지으면서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여자의 몸을 탐내십니까? 그런 절은 바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이었다.

 

 

우루루 ...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 지은 절간이 무너지고 있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덕은 다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불이나 타버렸다. 수덕도령이 날마다 목욕을 하고 몸가짐은 정돈이 되었으나, 마음 속에는 부처님보가 덕숭낭자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잿더미 위에 또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절이 잘 지어졌고, 절이 완성되자 덕숭낭자도 결혼을 승낙하였다.

 

 

결혼식을 올렸지만 덕숭낭자는 자기 몸에 손을 못대게 하였다. 참다 못한 수덕도령은 어느날 밤 덕숭낭자를 와락 껴 안았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문짝이 달가닥하고 떨어지더니, 이불이 공중에 뜨더니 자기를 밀어제치고 이불이 둥둥 떠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낭자는 온데간데 없고 버선 한 쪽만 쥐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천둥소리가 났다. 그러자 그들이 살던 집은 불더미가 되었고, 수덕도령이 앉아 있던 자리에 바위가 생겼다. 그리고 그 바위에 버선모양의 꽃이피었다. 덕숭낭자는 관음보살이 화현하여여 속세에 와서 살았다고 해서 "덕숭산"이라고 했고, 절간은 수덕도령이 지었다고 해서 "수덕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바위에 피는 꽃은 버선모양이라 해서 "버선꽃"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수덕사는 더 이상 그 옛날의 수덕사가 아니다. 그 옛날의 수덕사는 완벽하게 망가져 버렸다. 최근 어마어마한 중창불사로 으리으리한, 돈 냄새 물씬 풍기는 그런 절이 되었다.  마치 중국의 무술영화에나 나올 듯한 다듬어진 돌길에다 돌계단으로 화려의 극을 달린다. 값비싼 돌로..그리고 돌 난간에는 별별 촌스러운 발상들이 난무하여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관음바위의 전설

 

 

 

 

 

 

 

수덕사 대웅전 서쪽 백련당 뒤편에는 관음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버선꽃과 관음보살에 관한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는 통일신라시대를 지나면서 세월의 무게를 못 견디고 낡게 되었다.

 

 

중건이 필요하였으나 당시의 스님들에게는 그만한 재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중건을 위한 공양주를 바치겠노라 하며 찾아와 절에 머무르게 되었다. 불심이 깊고 미모도 빼어난 여인이 수덕각시라는 이름을 얻어 절에 머무니, 그녀를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깊은 산중도 마다하지 않고 몰려 들었다.

 

 

급기야 신라의 대부호이자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는 수덕각시에게 반해 청혼을 하기에 이른다. 수덕각시는 벌의 중건이 완성되면 정혜의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답한다. 사랑에 빠진 정혜는 가산을 털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 만에 끝낸다. 낙성식을 마치고 정혜가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수덕각시는 "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 "라는 말을 남기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다.

 

 

정혜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수덕각시는 다른 방으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당황한 정혜가 여인을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이 홀연히 사라졌다. 여인과 함깨 여인이 기거하던 방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은버선 한 짝과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만 남긴 채 말이다. 그 바위가 바로 지금의 관음바위이다.

 

 

수덕각시는 바로 관음보살이었으며, 이 때부터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하였다. 바위가 갈라진 사에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꽃이 피기 시작하였으니, 이 꽃이 바로 버선꽃이다. 지금도 봄이면 갈라진 바위 틈으로 아름다운 노란 꽃이 한아름 피어난다고 한다. 수덕각시를 사랑했던정혜(定慧)는 깨달음을 얻고서 수덕사 뒷산으로 올라가 정혜사를 지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이 여인의몸으로 내려와 절을 크게 중창하고 사라진 전설이 얽혀 있는 관음바위는 민초들의 기도처가 되었다. 이 바위에서 기도를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버선꽃

 

 

 

 

 

 

내포땅 가야산의 가장 이름 높은 명승지는 수덕사이다.가야산 남쪽 덕숭산(德崇山. 580m) 중턱에 널찍이 자리잡은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고찰이다. 고려 때 지은 대웅전익 ㅓㄴ재하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경허와 만공 같은 큰 스님이 있었다.그래서 노늘날에도 불교계의 덕숭문중은 큰 일파를 이루고 있다.

 

 

또한 수덕사는 "청춘을 불사르고"의 시인 김일엽 스님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여승들의 큰 선방이 여기 있어 청도 운문사 같은 청순한 이미지도 얻었다. 가수 송춘희가 부른 " 수덕사의 여승"..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같은 유행가까지 나왔다.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 왕흥사, 칠악사, 수덕사, 사자사, 미륵사, 재석정사 등 12개 사찰이 전하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백제 사찰인 수덕사의 창건 연혁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8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추정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문헌에 수덕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와 속고승전(續高僧傳)"으로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이 수덕사에 주석하며 법화경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의 寺格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덕여관     修德旅館

 

 

 

 

 

위의 일주문을 지나면 수덕여관이 있었다. 지금은 문화전시 공간으로 바뀌었다. 우리 현대미술사의 걸출한 화가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의 본부인이 운영하던 여관이었는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이제는 문화전시공간으로 바뀐 곳... 쓸쓸하고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여 있다.

 

 

 

 

 

 

 

 

 

1957년 고암 이응로는 자신의 예술을 국제무대에서 펼쳐 볼 의욕으로 독일을 거쳐 파리로 건너 갈 때, 그는 이화여대의 제자이었던 박인경과 함께 갔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버림받은 본부인은 수덕사 입구에 초가집 여관을 지어 운영, 수절하며 지내다가 운명을 달리한 듯하다.

 

1968년 이른바 "동베를린간첩사건"으로 이응로가 중앙정보부원에게 납치되어, 1년이상 감옥생활 할 때 옥바라지한 사람이 본부인이다. 그러나 이응로는 감옥생활을 마치고 미련없이 파리로 돌아 간다. 이것은 아름다운 애기인가? 슬픈 이야기인가?

 

 

아마 조선여인의 체념어린 순종을 마지막으로 보여 준 사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쓸쓸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이응로의 행태는 예술가적 기질이라는 명목으로 과연 면책될 수 있는 것인지?

 

 

 

 

 

 

 

 

이 곳 마당에는 감옥생활을 끝내고 이곳에 잠깐  머물렀던 이응로가 평평하고 너른 바위에 소위 문자추상화(文字抽象畵)를  그려 새겨져 있다.  "1969년 이응로 그리다"라는 낙관도 들어 있다.

 

 

 

 

 

 

 

 

 

 

 

 

 

 

 

 

 

 

 

 

                                           덕숭총림     德崇叢林

 

 

 

 

 

현재 우리나라에는 조계종산하에 통도사, 송광사, 백양사, 수덕사 등 모두 5개의 총림(叢林)이 있다. 총림(叢林)이란 교리 등 공부를 전문으로 하는 강원(講院), 참선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선원(禪院), 염불 정진을 전문으로 하는 염불원(念佛院), 계율 정진을 전문으로 하는 율원(律院) 등이 총망라된 사찰을 말한다.

 

 

 

 

 

                                            덕숭총림      덕숭총림

 

 

 

 

 

 

 

                                                         천왕문     天王門

 

 

 

 

 

 

 

 

 

 

 

 

 

 

 

 

 

 

 

 

 

 

 

 

 

 

 

 

 

 

 

 

 

 

 

 

 

 

 

 

 

대웅전        大雄殿

 

 

 

 

 

 

 

 

 

 

 

수덕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지명법사(智明法師)가 창건하고, 대웅전은 그 이듬해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연혁을 알 수 없다.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대사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다만 지금의 대웅전은 1937년에서 1940년에 걸친 중수 시 대들보에서 나온 묵서(墨書)에 의하여 고려 충렬왕(忠烈王) 34년 즉, 1308년에 건립되었음이 밝혀져 고려시대의 연대가 확실한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물 양식을 이어받은 특이한 고려시대의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우리나라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국보 제 49호이다. 

 

 

 

 

 

 

 

 

 

 

 

 

아무리 망가졌어도 대웅전이 있기에 수덕사는 가 보아야 한다. 고려시대 1308년에 세운 목조건축이라!  말이 그렇치 나무로 만든 집이 700년동안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차라리 숙연한 마음이다. 국보 제49호....이 대웅전 하나만을 보기 위하여 수덕사를 열번 찾아온다 해도 그 수고로움이 아깝지 않다.

 

 

철근을 사용하면서도 아무리 길어봤자 100년도 못 가서 헐어버릴 집을 짓고 있는 이 시대의 짧은 눈과 경박한 시대 정서에 대한 無言의 꾸짖음이 여기에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그 구조와 외형이 아주 단순하다. 화려하고 장식이 많아야 찬사를 보내는 현대인들에게 이 단순성이 보여주는 간결한 것의 아름다움,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수식이 가해지지 않은 필요미(必要美)는 얼른 다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안정된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웅전의 간결미와 필요미가 연출한 정숙한 아름다움에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그것은 마치 가벼운 밑화장만 한 중년의 미인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이다. (유흥준)  

 

 

 

 

 

 

 

 

 

 

 

 

 

 

                                             1997년의 대웅전 모습

 

 

 

 

 

                                     

 

 

 

 

 

 

 

 

 

 

 

 

 

 

수덕사 대웅전이 맞배지붕이기에 건물 앞에서 보면 조금은 딱딱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살짝 옆으로 돌아가서 측면에서 바라보면 아주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든 구조체가 눈에 들어온다. 외모에서 보여지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곡선미를 표현하고 있다. 사용된 부재가 힘을 받는 구조체이면서 동시에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修德寺 대웅전과 浮石寺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이 모두 고려 때 만들어진 건축이지만, 그 내면에는 각각 백제와 신라의 문화적 특징이 베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지역에서 출토된 공예품이나 남아 있는 석탑 등에서도 지역적 특징을 담고 있다.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1308년, 국보 제 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1376년에 중수하였다.

 

 

예를 들면 백제의 금동탑 조각이나 석탑의 지붕은 곡선적인데 비하여, 신라의 집모양 토기(家形土器)나 석탑의 지붕은 직선적이다. 백제의 문화적 특징을 도교사상이 배어있는 자연주의라면, 신라는 유교사상을 좋아하는 보수주의로 느껴진다. 이것은 중국의 화북지방 건축과 화남지방 건축을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마 신라는 북방지역 문화와, 백제는 중국의 남방지역 문화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생각된다.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고려시대 건물로써 "곡선"이라는 요소를 이용하여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곡선을 이용하여 건출물을 만들어도 이 두 건물은 전혀 다른 조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하나는 감추어진 곡선미의 건축이라면, 다른 하나는 드러낸 곡선미의 건축인 것이다.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오래되기로는 2, 3번째에 해당하며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축물이다. 고려 때 지어진 두 건물은 모두 전체적으로 간결하다. 그러나 수덕사 대웅전이 장중하면서도 힘찬 직선의 미학을 보여준다면, 부석사 무량수전은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곡선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이런 비유가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대웅전은 남성적이고, 무량수전은 여성적이다.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의 맞배지붕으로 간결함과 단순함의 미학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건축물이다. 맞배지붕은 지붕이 건축물의 좌우에는 없고 앞뒤로만 맞붙어 있는 형태의 지붕을 말한다. 맞배지붕은 우리나라 기와 건물의 지붕가운데 가장 단순하다.

 

 

다음은 대웅전 정면 .. 지붕은 단순하면서도 다소 육중하고 무거워 보인다. 하지만 잘 들여다 보면 간결함과 장중함이 묻어 나온다. 묵직함과 간결함이 만들어 내는 안정감이다. 중간을 약간 배불리 나오게 만드는 배흘림 기둥은 이 묵직한 지붕을 튼실하게 받쳐 준다. 둔탁함 속에 세련된아름다움이 묻어난다.

 

 

대웅전의 옆면 .. 대웅전의 매력과 미학은 옆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옆에서 볼 때 지붕은 약간의 곡선을 그리며 ( 유감스럽게도  이 곡선은 일본인에 의한 보수에 의해 만들어 졌다) 사람 人자 모양을 하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보아도 역시 육중하고 견고하다. 지붕 밑으로는 수평 부재인 보(량..梁)가 가로놓여 있고, 지붕과 보가 연결되는 지점에 지붕의 하중을 전달받기 위한 다양한 부재들이 단아하게 맞춰져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장식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간결명료하다.

 

 

기중과 보의 나무부재들은 가로 세로로 놓이면서 대웅전 옆쪽 벽면의 공간을 멋지게 분할하고 있다. 단순한 듯 하지만 절묘한 기하학적 구성이다. 크고 작은 사각형 공간 사이사이로 곡선이 가미된 사다리꼴 공간이 변화와 생동감을 연출한다.

 

 

 원형과 직각의 나무 부재 역시 서로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에 힘입어 대웅전 옆면 전체에는 조용하지만 경쾌한 리듬이 넘쳐난다. 그 위로 기와지붕의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전체를 감싸고 있다. 기하학적 구성과 경쾌한 리듬감 그리고 견실한 힘, 禪의 사찰 수덕사에 걸맞게 침묵하면서도 심오한 기피을 전해 주고 있는 대웅전이다. 이것이 바로 대웅전의 진정한 미학일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의 매력은 수덕사 대웅전과 또 다르다. 정면 5칸, 옆면 3칸의 무량수전을 보면 사뿐히 고개를 치켜든 날렵한 지붕 곡선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함참을 들여다 보노라면 처마가 춤을 추듯 출렁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착시(錯視)이지만 그 출렁거림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곡선의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이같은 곡선의 미학은 무량수전 건물에 담겨 있는 다양하고 절묘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안허리曲, 귀솟음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안허리곡은 건물 가운데보다 귀퉁이의 처마 끝을 좀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귀솟음은 건물의 귀퉁이 부분을 가운데 보다 높게 처리한 것을 말한다. 결국 안허리곡과 귀솟음은 건물의 귀퉁이 부분을 좀 더 높게 튀어나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려의 장인들은 무량수전에 왜 이런 장치를 넣었을까. 건축물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귀퉁이쪽 처마와 기둥이 실제 높이보다 처져 보인다. 보는 사람의 눈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착시(錯視)이다. 안허리곡과 귀솟음은 이 같은 착시를 막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모퉁이쪽이 쳐져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부러 그 부분을 높게 그리고 튀어나오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건축적 고안이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서로 어울리면서 빼어난 곡선을 연출한다는 점이다. 건물 앞면이 마치 볼록거울처럼 휘어져 보이는 것도 안허리곡과 귀솟음 덕분이다. 그렇게 휘어진 건물의 곡선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인다. 무량수전 앞에 섰을 때, 지붕과 기둥이 출렁거리 듯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직선의목재가 만들어낸 곡선의 아름다움이다. 무량수전 역시 별다른 장식이 없다. 게다가  오랜 세월 탓에 단청도 많이 사라져 나무의 살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더욱 담백하고 간결한 느낌이다. 담백함과 간결함 속에 물결치는 곡선, 그 상쾌한 율동감이 무량수전의 미학이다.         

 

 

 

 

   

 

 

 

 

 

 

 

 

 

 

 

 

 

 

 

 

 

 

 

 

 

 

 

 

 

 

 

 

 

 

 

 

 

 

                                               대웅전의 맨 얼굴

 

 

 

 

 

 

 

 

 

 

 

 

사람이고 건물이고 간에 겉으로 드러나는 각각의 면면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공들여 치장을 한다. 하지만 때로 그 것은 본질의 매력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예쁜 꾸밈에 먼저 눈이 가서 그 속에 숨겨진 진짜 얼굴을 보지 못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수덕사 대웅전이 단청이라는 화려한 옷을 계속 덧 입었더라면 700여 년 세월을 건너온 고색창연함 또한 그 속에 묻혀버리지 않았을까... 

 

 

 

수덕사 대웅전 외부는 단청을 하지 않은 " 맨 얼굴 "이다. 이 절에서 출가한 후 여러 절을 돌다가 다시 돌아온 법안(法眼)스님은 고려시대 이후 단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바람에 벗겨지면 벗겨지는대로 두고, 다만 나무가 썩지 않도록 약품처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나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기둥의 수많은 결들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단청을 했더라면 이 결들은 그 색에 갈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건축물의 외형은 각 부재(副材)들이 이루어내는 면분할(面分割)의 조화 여부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수덕사 대웅전의 면분할은 무엇보다도 건물의 측면에 구현되어있다.  우리 시대의 건축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간결성의 멋과 힘이 거기에 있다.

 

 

기둥과 들보가 속으로 감추어지지 않고 겉으로 드러 난 것이 현대건축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기술상의 미완성이나 마무리의 불성실로 비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튼튼한 부재의 정직한 드러냄이야말로 이 집이 천년이 지나도 끄떡없을 것임을 자랑하는 건실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더욱이 가로,세로의 면분할이 가지러한 가운데 넓고 좁은 리듬이 들어가 있고,둥근나무와 편편하게 다듬은 나무들이 엇갈리면서 이루어내는 변주는 우리의 눈맛을 더없이 상큼하게 열어준다.

 

 

 

이처럼 단순하고 간결한 구조 속에서 정숙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조형적 이상으로 삼은 수덕사 대웅전이니, 벽면이나 문짝의  처리 또한 이러한 미적 목표에서 벗어날 리 있겠는가? 대웅전 벽면은 아무런 수식없이 흰색과 노란색 단장으로 저 조용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린 것보다 더 큰 그림 효과를 얻어 낸 것이다.

 

 

정면이나 측면의 문짝 창살무늬를 보면, 마름모꼴의 사방연속무늬라는 역시 단순한 구조이지만 거기에 공들인 목공의 치밀한 손끝을 감탄없이 바라 볼 수 는 없을 것이다.부안 내소사의 창살무늬가 화려한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찬사를 받고 있지만  글쎄?

 

 

 

 

 

 

 

 

 

 

 

 

 

 

기둥 상부에는 창방을 걸고, 기둥 직상부에만 공포를 짜 올린 주심포식 건물이다. 공포의 구조는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워 주두를 놓은 다음 툇보 뺄목인 두 제공과 출목첨차를 올리고, 외목도리를 걸었다. 창방 위에 평방은 생략되었고, 주두와 소로 굽에는 약한 곡선과 굽받침이 있다.

 

 

첨차의 하단부에는 연꽃주변의 곡선을 응용한 연화두식 초각을 새겼는데,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 목조건축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기법이다. 또한 귓기둥의 키를 조금 ?여 마든 귀솟음이 적용되어 있는 것도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툇보 위와 대들보 위에 화려한 복화반을 놓고, 그 위에 포대공을 설치하여 중도리와 종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종량 위의 포대공 좌우로는 "人" 자 모양의 솟을 합장을 설치하여 구조적인 안정성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보 상부에 걸친 우미량(牛尾梁)은 구조적 완벽성과 함께 장식적 의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러한 목구조는 완벽한 기술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건축기법으로, 건축이라기 보다는 공예품같다고 할 수 있다. 같은 고려말기에 건립된 부석사 무량수전과 비교해 볼 때 영남지방의 직선적인 구조미와는 달리 곡선미를 지니고 있다. 

 

   

 

 

 

 

 

 

 

 

 

 

 

 

 

 

                                            우미량    牛尾梁

 

 

 

 

 

 

 

 

 

 

우미량은 조선 초까지 주심포형식의 건물에서 주로 나타난다. 우미량은 직선 부재가 아니라 , 소꼬리처럼 생긴 곡선부재이다. 크기도 작으며 기둥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도리에서 밑에 있는 도리를 연결하는 부재이다.

 

 

이 우미량은 구조적인 기능도 뛰어나지만, 곡선의 아름다움을 더 해주고 있다. 이곳 수덕사 대웅전 측면에는 좌우에 3개씩 소꼬리처럼 휘어져 올라간 부재가 우미랑이다. 홍예초방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기둥  ... 700년 세월의 흔적 

 

 

 

 

 

 

 

 

 

 

 

 

 

 

 

 

 

 

 

 

 

 

 

 

 

 

 

 

 

 

 

대웅전의 초석(礎石)은 자연석 주초(柱礎)를 사용하였다. 대웅전 정면열 평주(平柱)와 우주(隅柱)의 초석들은 기둥이 올려지는 자리에 주좌(柱坐)를 둥근 형태로 돋음하여 놓았다. 주좌는 주초 윗면에 기둥을 받치는 부분을 약간 높게 자리새긴 자리를 일러 柱坐 라고 한다.

 

 

고려시대의 초석의 형태는 정교한 가공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양을 취하여 사용하고 있다는것을 남아 있는목조건축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의 초석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바로 양 측면 중앙의 사각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의 크기와 이형(異形)이 그것이다. 건물 형태에서 가장 중추역할을 하는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기둥인지라 내려 앉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다른 초석보다 크기가 큰 자연석을 사용하고 있다.

 

 

또 돋음주좌 없이 자연석 주초의 형태 위에 기둥을 올려 놓았기 때문에 울퉁불퉁한 주초 단면에 따라 사각기둥 하단부분을 그렝이질(기둥 밑둥과 주춧돌이 밀착하도록 껴맞 춘 정밀한 작업)하여 두 부재가 맞닿는 면이 일치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배흘림 기둥

 

 

 

 

 

 

배흘림기둥.... 기둥이 아래에서 위로 곧바로 뻗어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가운데부분이 슬쩍 부풀어 탱탱한 팽창감을 느끼게 해주고,윗부분을 좁게 마무리한 기둥을 배흘림이라고 한다. 이 배흘림기둥은 삼국시대이래로 우리 목조건축의 중요한 특징이며, 그리스신전에서도 이 형식이 나타나 이른바 엔타시스(entasis)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배흘림기둥인가? 

 

 

배흘림 기둥들은 탄력성있게 보이며, 기둥 모양이 짓눌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은 채 지붕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있는 물체가 힘 안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수덕사 대웅전을 앞마당 아래쪽에서 정면으로 올려다 보면 지붕골이 아주 길고 높아서 지붕의 하중이 대단히 위압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더욱이 이 지역 백제의 건축물들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은 것이 특징인바, 그로 인하여 위압적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 팽팽한 팽창감의 배흘림 기둥이 탄력있게, 어찌 보면 상큼하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서 우리에게 하등의 시각적 불편이나 무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즉, 이 건물을 정면으로 올려다 보면 지붕골이 아주 길고 높아서 지붕의 하중이 대단히 위압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더욱이 이 지역 백제계 건축들은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이 넓은 것이 특징인바 그로 인하여 위압적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들게  것이다.  그러나 저 팽팽한 팽창감의 배흘림기둥이 탄력있게,어찌보면 상큼하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서 우리에게 하등의 시각적 불편이나 무리를 느끼게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 내부 벽화

 

 

 

 

 

 

 

 

 

수덕사 대웅전 내외부에는 모두 벽화와 단청이 있었으나, 기록으로만 전할 뿐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더욱이벽화는 1937년 일제에 의해 해체수리 공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내부 벽체에 부분적으로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당시 벽화모사의 대가 임천선생이 그렸던 모사도 30여 점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해체 수리할 때 촬영된 사진에 의하면 벽화는 창방 및 고주 위쪽의 포벽, 종량과 퇴량 밑의 공간에 여래, 주악비천, 공양화, 나한, 극락조 등을 섬세하고 생동감있게 표현하였다. 다행히 대량 및 중량, 도리에 운룡도, 봉황도, 서수도, 서조도, 연화도 등을 그린 별화(別畵 .. 단청한 공간에 사람, 꽃, 새 등을 그린 그림) 17점이 남아 있어 사라진 벽화의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별화는 대량에 그려진 운룡도(雲龍圖 .. 위 사진)이다. 이 그림은 다른 사찰에 그려져 있는 운룡도와는 다르게 채색에 金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 내부에 운룡도는 8점이 발견되는데, 전각 창건 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제외한 나머지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龍의 비늘을 금박으로 볼륨감있게 붙여 실제 구름 속을 날아가는 것처럼 입체감을 살리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대웅전 전각의 내부는 반자(천정)를 꾸미지 않고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법당의 개방적 공간감을 살리고 있다. 법당 안 2열로 2개의 고주(高柱 .. 平柱보다 키가 큰 기둥. 흔히 안통에 서 있어 내진주(內陣柱)라고 부른다)를 세웠으며, 이 2개의 고주 위로 대들보가 얹어졌다. 대들보에는 금룡도가 그려져 있으니, 동측 법당 안으로 빛 이 들어오는 이른 시간에는 감상할 수 있다.

 

 

 

 

 

 

 

                                             우물천정   연등천정

 

 

 

 

 

 

 

건축물에 있어서 지붕틀이나 상부의 바닥구조를 감추기 위하여 그 밑에 별도의 천정틀을 구성하여 덮개를 설치하는 것을 천정이라고 하며, 천정에 틀을 짜고 판재를 댄 우물 천정과 지붕 가구가 그대로 보이게 어떠한 장치도 하지 않은 연등천정이 있다.    

 

 

 

 

 

 

 

 

 

 

 

 

 

 

 

 

 

 

 

                                            日本이 수리한 대웅전

 

 

 

 

2003, 8,29.. 수덕사는 3년에 걸쳐 일본학자들과 공동으로 조사 연구한 자료인 "수덕사 대웅전 - 1937년 보존수리 공사의 기록"이라는 책자를 공개하였다. 이 책자는 일본 교토대학 자료와 국립중앙박물관 자료를 중심으로 200여 장에 이르는 사진과 도면자료를 제시하고,  해체 수리 공사의 개요 및 벽화, 명문, 유물 등에 대한 해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사진자료는 수리 전, 수리 후 그리고 수리과정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고, 또 연구과정에서 수덕사 대웅전이 과거 "비로전(毘盧殿)"이었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발견되었다. 

 

 

 

 

 

 

 

 

위 사진은 수리 전인 1937년의 대웅전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수리 후 현재의 모습이다. 수리 전의 모습을 보면 중앙에만 띠살문이 있고 좌우측에는 윗부분에 살창만 있는 그냥 벽체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수리하면서 빗살문으로 모두 교체되었다.

 

 

 

 

 

 

 

 

 

 

 

 

 

좌측 사진은 서쪽 측면의 수리 전, 후의 사진이고, 우측사진은 동쪽 측면의 수리 전, 후의 사진이다.일본에 의해 수리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1803년에 붙였던 풍판(風板)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미관상 확실히 보기 좋고, 또한 원형에 가까운 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문이 새로 생겼다.이는 정면의 빗살문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서쪽 측면의 사진을 보면 보조 기둥이 각각 좌우에 하나씩 있었는데, 보수 후에는 제거되었다. 또한 직선에 가까웠던 지붕의 선이 부드러운곡선으로 바뀌었다. 즉 현재 수덕사 대웅전 측면의 부드러운 곡선의 美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복원 중에 잘못된 것이 하나 있다면 위 사진의 닫집이 철거된 것이다. 일본에 의한 보수 공사 후 닫집이 사라진 후, 현재에는 불단만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나저나 일본에 의해 보수된 이 건물을 보면서 여러가지로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가?ㄴ 것을 보면서 일본이 우리의 문화재를 망친 줄로만 알았지, 수덕사 대웅전과 같이 비교적 잘 보수한 것들은 모르고 있거나 지나치고 있다. 닫집의 철거는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지만.... 

 

 

 

 

 

 

 

 

 

 

 

 

 

 

 

 

 

 

 

                                                수덕사 거문고

 

 

 

 

 

 

 

 

수덕사 성보박물관에는 고려 공민왕이 소유했었던, 700년이 넘은 역사를 갖고 있는 거문고가 현재 보관되어 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이강(李堈)으로부터 만공스님(滿空. 1871~1946)에게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길이 164cm, 폭 20cm의 크기로 문화재자료 제192호로 지정되었다.

 

 

 

 

 

 

 

 

이 거문고는 은은한 붉은 기가 감도는 오동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이 거문고의 대모(玳瑁)는 노란색으로 되어 있다. 거문고에서 술대를 받는 부분에 쇠가죽을 대고 그것을 대모라고 부르는데, 대모(대모)는 원래 새부리 모양의 주둥이를 가진 바다 거북이의 이름이다.

 

 

이 보물급의 거문고가 왕실에서 산사로 전해지게 된 경로는 확실하지 않으나 공민왕(恭愍王)이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왕실의 가보로 수 많은 왕손들의 손때가 묻으면서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의친왕 이강(李堈)의 손에서 만공스님에게 신표로 건네졌다는 것이다.

 

 

전달 과정도 조선 말 상궁나인들이 자주 만공스님을 친견하고 불공을 드렸다는 것이 유일한 물증이며, 탁영금(濯纓琴)처럼 다른 문헌에 확인된 바가 없어 最古의 거문고라는 공인을 못 받은 실정이다. 전달 시기도 확실치 않고 만공스님이 수덕사에 머물면서 법을 편 1904년부터 열반에 든 1946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거문고 뒷판에는 거문고 주인이 공민왕(恭愍王)임을 알려주는 찬무과 만공스님으 게송(게송)이 새겨져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대 감식안이었던 육교 이조묵(六橋 李朝默 .. 1792~1840)이 1837년 날렵한 초서로 새긴 찬문은 다음과 같다.

 

  

 

 

 

 

 

 

 

 

 

 

거문고는 부들 매어 놓은 것처럼 넉넉하고 부들 줄의 옥고리환패는 좋은보물로 삼을만 하다. 공민왕이 신령스러운 오동나무를 얻어 이것을 만들었으니, 그후 야은 길재(冶隱 吉再)가 보배처럼 소장하고 명현고사들이 그 맑고 상쾌한 소리와 가락을 특별한 여흥의 일로 삼아 다투어 켜지 않음이 없었다. 택당 이식(澤堂 李植)이 글을 새기고 분서 박장설(汾西 朴長卨) 등이 더불어 진실로 아꼈었고, 이제 거지반 마멸되었으나, 그 품질은 세간에 증명하기에 충분하여 다행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정유(1837)년 대를 쪼개는 날(10월10일의 破字. 대나무 竹은 전자체로 十十으로 쓰며 이를 쪼개면 十月十日이 된다) 육교는 이에 제목을 붙여 예찬의 글을 쓴다.

   

 

 

 

 

 

 

 

 

 

 

 

또한 만공(滿空)스님의 소유를 드러내는 낙관과 함께 스님의 친필로 쓴 게송(偈訟)은다음과 같다.

 

 

 

 

 

 

 

 

한 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는 무슨 곡조인가. 이는 일체의 현현한 곡이로다 / 한 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는 무슨 곡조인가. 이는 일구의 현현한 곡이로다 / 한 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는 무슨 곡조인가. 이는 현현하고 현현한 곡이로다 /  한 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는무슨 곡조인가. 이는 돌장승의 아? 가운데 겁(劫) 밖의 곡이로다. 아하 /

 

 

 

말년까지 만공스님을 시봉하였던 원담스님에 따르면 만공이 거문고를 즐겨 타거나 잘 다루지는 않았으나, 다만 띵 띵 하고 뜯는 정도이었다고 한다. 만공스님의 거문고는 스님이 열반한 후 정혜사(定慧寺) 다락 속에깊이 보관되어 있다가 1998년 수덕사 성보박물관이 개관하면서 함께 비로소 일반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노사나괘불탱      盧舍那掛佛撑

 

 

 

 

 

 

괘불탱(掛佛撑)이란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걸어 놓고 예배하는 의식용 불화이다. 따라서 법당에 봉안되는 일반 탱화와는 구별된다. 곧 대중이 모이는 큰 재(齋)나 석가탄신일에 의식을 거행할 때 법당 앞의 당간지주에 걸어 놓고 예불을 드리는 것이 괘불탱이다. 

 

 

佛畵로 본존불을 대신하는 만큼 괘불탱의 내용에는 儀式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봉안하는 절차 또한 매우 엄숙하다. 예를 들면 현세에 오래 살기를 바라며 來世에 영산회상을 다시 만나는 복락을 기원하는 영산재(靈山齋), 죽은 뒤에 행할 불사를 살아 생전에 미리 지내는 예수재(豫修齋), 물과 땅 위에 널려 있는 외로운 魂과 아귀를 달래고, 이들을 천도하는 수륙재(水陸齋) 등으로 영산재의 경우 영산회 괘불탱이 봉안된다. 이들 齋의 목적이 살아서는 무병장수하고, 죽어서는 불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미루어 괘불탱은 대부분 망자천도용으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괘불탱은 그 크기로 인하여 바람이 있는 날에는 당간지주에 거는 것이 위험하므로, 1년에 몇 번 큰 행사에만 내다 걸거나 아니면 괘불함에 보관된다., 그래서 일반 탱화보다 보존과 보안 유지가 잘 되며 도난의 위험도 적어서 오래된 괘불탱이 많이 남아 있다.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괘불탱은 17세기 작품들로 5.15m의 압도적인 크기이다. 질긴 삼베 바탕이 대부분이나 비단 바탕도 있으며 종이 바탕은 드물다.

 

 

대형화된 괘불탱은 양식적인 특징, 기법, 형식 등이 일반 불화와 유사하지만, 큰 화면을 빈틈없이 채운 권속(圈屬)은 조그맣게 묘사하여 주존불을 단독불처럼 보이게 하는 괘불탱 특유의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특히 17,18세기 괘불탱의 채색법은 적색과 녹색 위주에 황, 청, 백, 흑색을 뛰어나게 배합한 색의 조화가 佛土 혹은 법회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고도로 발전된 문양과 영락 장식이 어우러진 현란함과 화려함은 예배자를 숭고한 종교적 정신세계로 빠져 들게 한다.      

 

 

 

 

 

 

 

 

 

                                            보물 제1263호

 

 

 

수덕사 괘불은 1673년 (조선 현종 14) 4월에 조성된 것으로, 삼신불 (三神佛 .. 석가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가운데 보신(報身)인 노사나불을 그렸다. 괘불의 화면 구성을 살펴보면 정면을향해 서 있는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해들 들고 있는 일광보살과 달을 들고 있는 얼광보살을, 정병을 쥐고 백색의 천의를 두른 관음보살과 석장을 지고 있는 지장보살 등 12 대보살을 좌우대칭으로 에워싸듯 화면의 아랫부분에서 2/3지점까지 그렸다.

 

 

 

가섭과 아난 등의 10대 제자  역시 좌우대칭으로 화면의 상단부인 두광 옆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합장을 하고 화면의 중간부분에 점한 범천과 제석천 역시 마주 보고 있다. 가장 아랫단에는 사천왕상을, 화면의 윗부분에는 비천상을 배치하여 지권인의 화불을 포함하여 9구의 화불이 장엄하는 보관을 쓴 노사나불은 하품중생인의 설법인을 하고 있다. 목걸이 등의 영락장식은 매우 화려하며 모란문양 등으로 그려진 천의를 걸치고 있으며 두 발은 연화좌 위에 올려져 있다. 거신광에는 8구의 화불이 4구씩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노사나불      盧舍那佛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신 공덕으로 나타나신 부처님으로 복과 덕이 가득하게 이 세상으 불쌍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이다.삼신불의 하나인 보신불(報身佛)이라고도 한다. 노사나불은 무량겁 동안 수행한 끝에 깨달음을 얻어서 연화장장엄세계해(蓮花藏莊嚴世界海)에 머물면서 털구멍마다에서 나타나 여러가지 형상으로 변하는  化神을 나투어 사방에 광명을 발하고 무량한가르침을 베풀어 일체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영락     瓔珞

 

 

 

 

 

영락(瓔珞)은 원래 인도의 귀족들이 몸을 장식하는 풍습에서 유래하였다.으나 후에는 불상 특히 보살상의 손과 팔, 다리를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 밀교에서는 뱀, 해골 등으로 영락을 한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영락장식이 유행하였으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세련되고 화려한 영락장식으로 발전하였으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보살상의 양식적 변화와 함께 점차 형식적인 상징물로 표현되었다. 普薩瓔珞本業經에 의하면 보살의 수행에 따라 금, 은, 동, 유리, 수정 등으로 된 영락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영락들은 각기 다른 기능과 위력을 가지며 중생을 위해 널리 쓰여진다고 되어 있다.                                      

 

 

 

 

 

                                             비천상     飛天像

 

 

 

 

 

 

비천상(飛天像)은 범종에 많이 장식되고 있지만, 법당의 천정, 석등, 부도, 불화 또는 단청의 별지화(別枝畵) 등에도 나타난다.비천은 불국토를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 찬탄하는 천인의 일종이다. 천의(天衣)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비천상은 도교 설화 속의 선녀를 연상케 하지만, 비천의 조상을 그렇게 아름답거나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고려 초기의 석탑이다. 2층의 기단으로  상층기단은 4개의 돌로 면석을 조립하였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표현해 놓았다. 지붕돌과 몸돌은 각각 한개의 돌로 만들었다.

 

 

탑신 1층은 5개의 옥개받침을 갖고 있으나, 탑신 2층과 3층은 각 3개의 옥개받침을 갖고 있다. 석탑 상륜부에는 3층의 지붕돌가 한돌로 만들어진 노반(노반)이 있으며, 수레바퀴 모양의 보륜과 보개(寶蓋)가 남아있다. 지붕돌 끝이 올라가 있으며, 파손된 귀퉁이 부분이 보인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탑의 높이는 410cm이다.

 

 

 

 

 

 

 

 

 

 

 

 

 

 

 

 

                                            포대화상    布袋和尙

 

 

 

 

 

 

 

 

포대화상은 중국 승려로 법명은 계차(契此)이다.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이었다. 또한 지팡이 끝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물건이 다 들어 있어서 중생들이 원하면 무엇이든 다 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포대화상이라고 불리었다. 중국에서는 포대화상이 재물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이 있다. 화상은 중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출처 : 김규봉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非山非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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