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김영택의 펜화기행32- 승보사찰 송광사

문근영 2013. 4. 7. 04:37

제목: 김영택의 펜화기행32- 승보사찰 송광사
분류: 칼럼
이름: 8.김영택






1930년대의 송광사


1930년대의 육감정과 우화각((엽서)


육감정 옛사진(송광사 제공)


송광사 입구의 다리 '청량각'. 기둥 사이에 걸터 앉을 수 있는 난간을 두어 계곡을 감상 할 수 있다.


'이하영'이란 이름은 고종 때 법부 대신등 요직에 올랐던 입지전적 인물의 이름으로 보인다.
이하영은 부산의 상점 점원을 하다가 뜻한 바 있어 한양으로 올라와
닥터 알렌을 찾아가서
"열심히 일을 할테니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여 영어를 터득한다.
알렌의 눈에 든 하영은 미국유학을 하고 귀국 후 외무아문의 주사로 시작하여 주미 대리공사에 오른다.
그는 주미공사관에서 위싱턴 외교 역사 최대인 1000명의 명사 초청 댄스파티를 벌려
유명인사기 되는데 유창한 영어와 출중한 용모에 능란한 춤 솜씨로
워싱턴 사교계에 '상투 튼 멋쟁이'라는 별명으로 뭇 여성을 울렸다 한다.
이태리 육군 장관의 딸이 이하영에게 반하여 결혼을 청하자 하영은
'조선의 국법이 외국 여성과 결혼을 금하고 있다'고 둘러 댔는데
육군장관의 부인이 이태리 황제에게 청을 넣어 이태리황제가 고종황제에게
'결혼 을 허해 달라'는 국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한다.
귀국한 하영은 법부 대신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재에도 밝아서 조선 최초의 고무신 공장을 차리기도 했다.
이하영은 서소문 밖에 집이 있었다.
* 조선조 절 입구의 암벽에 이름을 새겨주는 석공이 있어 절에 얼마의 돈을 시주하고
이름을 새기는 것이 유행하였다.
억불승유 정책으로 어려운 시절 절의 수입으로 허용된 듯 하다.
절에 들어 갈 때 유심히 보면 아는 이름들을 볼 수 있다.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의 자랑인 비석군


일주문


개울을 막아 만든 연못에서 본 우화각과 입구


신영훈 대목이 설계한 '대웅보전'으로 여늬 절과는 사뭇 다른 모양으로 지었다.


죽은 고목으로 만든 '비사리 구시'로 엄청난 양의 밥을 넣을 수 있었다 한다.


목어와 법고


종루앞 매화


관음전 앞의 계단 소맷돌로 고졸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감로탑과 송광사 당우들의 지붕


창건주인 보조국사가 꽂은 지팡이가 살아난 향나무로
지눌 스님이 죽기전 "이 나무는 나와 함께 죽었다가 내가 다시 태어나면 살아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고향수'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대웅전 뒤에 스님들의 수행공간을 두었다.
진여문은 대웅전 뒤 설법전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송광사 율원으로 가는 길


우화각과 육감정의 현재모습

승보사찰 송광사

인간 세포를 복제하여 인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미세한 세포에 인간의 설계도와 제조방법, 지능 등

엄청난 정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의 저장능력이 얼마나 더 발달해야 비슷한 수준이 될지 전문가도 예측하기가 어렵다고 하니

인간과 신의 능력차이라고 보아야 겠지요.

한술 더 떠서 저장능력이 무한대인 것도 있답니다.

불경 중에 가장 수준이 높다는 화엄경을 210자로 압축한 법성계의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는

‘작은 티끌에 온 세상이 담겨있고, 모든 티끌은 모두 똑같다’라는 말로 저장능력이라는 단어가 무의미 해 집니다.

이 세상의 본질인 불성(佛性)은 시간과 공간, 질량 등에서

3차원 존재인 지구 인간의 상식으로는 설명과 이해가 불가능 한데

깨달은 스님만이 알게 된답니다.

다차원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깨달은 스님은 ‘내가 곳 너’, ‘나비와 내가 하나’라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을 합니다.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큰 스님,  즉 국사(國師)가 16명이나 배출된 절이 승보사찰 송광사(松廣寺)입니다.

그래서 송광사에는 대웅전 뒤에 스님들의 수행공간을 두었습니다.

불보사찰인 통도사는 대웅전 뒤에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고,

법보사찰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을 모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국내에서 건물이 가장 많았다는 송광사는 전란으로 많은 불당이 불타 없어 졌으나

절 입구의 우화각과 육감정 누대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개울을 막아 만든 연못에 장주석을 세우고 누마루를 덧붙인 육감정과 우화각이

물속에 비친 모습은 송광사의 백미입니다.

1930년대와 다른 점은 육감정의 난간이 계자각으로 바뀐 정도입니다.

그래도 1930년대의 모습으로 복원한 그림과 현재의 모습이 9군데가 다르니

신문의 그림과 현장을 비교하여 달라진 부분을 찾아보세요.


* 후기 : 송광사를 그림으로써 3보 사찰을 모두 그린 셈이 되었습니다.

사실 2002년 통도사 15개 법당을 그린 후 신문과 잡지 연재를 계속하면서

여러 절에서 유. 무언의 압력이 많았습니다.

해인사 주지 스님은 “이 사람이 우리 절은 언제 그리려는고?”하는 등

섭섭함을 전하기도 했고,

송광사 주지 영배스님도 무언의 압력이 있었지요.

출처 : 청정남
글쓴이 : 청정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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