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스크랩]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어느 독자의 편지

문근영 2012. 8. 15. 12:09

법정스님의 모습

어느 독자의 편지


출판사로 보내온 독자들의 편지를 들추어보면서, 새삼스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우정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요즘처럼 이기적이고 삭막한 세상에서는 친구 사이의 정이 더욱 귀하고 절실하다. 우정은 인간의 정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감정이다. 무릇 인간관계가 아름답고 진실하게 지속되려면 거기에는 순수한 우정이 받쳐주어야 한다.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열여덟 살 소녀의 편지를 받아보고 그 내용이 너무 기특하고 착해서 이 자리에서 함께 나누어보려고 한다.

"......오늘, 스님 책을 읽었는데요. 책 읽던 도중에도 몇 번이나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다 읽고 나서 쓰자' 해서 지금 쓰는 거예요."

그 학생은 방학중인데도 보충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보충수업의 실상을 전해듣고, 이 땅의 어린 싹들이 잘못된 교육 때문에 얼마나 큰 희생과 고통을 겪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말이 보충수업이지 아침 7시 20분 등교, 밤 9시 35분 하교는 평소와 다름없어요. 그래도 방학하고 일주일이나 쉬게 해주었으니 그게 어디예요. 3학년 선배들은 3일밖에 못 쉬었어요.

대입시험이 100일 조금 더 남았거든요.(이 편지를 쓴 시기가 7월이다) 8월 10일이 D-100일인데 그때부터 죽음의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는 거죠."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자기 반 47명중에서 상위권에 드는 것 같다.자신의 삶은 매일 반복되는 현실에 짜증내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쓸데없는 일로 화내고 고민하는 것의 연속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내일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스님은 저희 학교가 어떤 곳인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나는 문과인데 20개 과목을 하루 9교시 수업, 2시간의 특강, 3시간의 자율학습으로 받고 있어요. 매달 한 과목 시험 시간이 90분, 120분인 수능 모의고사를 치러야 하고, 자율학습이라는 명목 아래 강제 타율학습으로 행해지고 있는 시간에 튀었다가는('튄다'는 말은 집에 간다는 은어인 모양이다) 다음날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맞게 돼요. 아침 7시 20분까지 등교인데 조금만 늦으면 얻어맞고, 내려진 셔터(출입구가 셔터로 되어있다고 한다) 밑으로 기어 들어가야 돼요.

선생님들은 단순한 지식을 가르치는 기계이고 '너희들을 위해서'라며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다뤄요. 옆에 있는 친구들은 적일 뿐이고 학교는 전쟁터예요. 아무리 아파도 조퇴는 안돼요. 죽는 그 날까지 오로지 대학 합격을 위해 전진 또 전진만 있을 뿐이죠."

그는 답답해 미칠 것 같다고 하면서 더 속상한 것은, 이런 상황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고 적응해 가는 자신의 무기력하고 바보 같은 모습이라고 했다.

이런 교육여건 아래서 아이들이 투신 자살하거나 정신 이상이 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자위하기에는 이 땅의 교육이 너무도 비인간적이고 비교육적인 점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고2짜리인 그는 자신을 '왕따'라고 한다. 왕따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라는 자기네 속어라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한 친구를 생각하면 즐거워진다고 했다. '그 애 생각을 하면 전 살고 싶어요'라고 할 만큼 사랑하는 친구다. 자기네가 남쪽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지금은 멀리 떨어져 지낸다. 그 친구는 중1 때 사귀었는데 1년 반을 함께 지내고 3년이나 떨어져 있지만 항상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이 서로 소식이 오고가는 모양이다.

최근에 친구네 형편이 안 좋아 많이 울고 가슴 아파한다. 직장에서 실직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친구네 아버지는 제일 먼저 해고를 당했다. 정신이 좀 부실한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도 공장에 다니는데 척추 장애자라고 한다. 이런 가정환경인데도 친구는 성격이 명랑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했다.

그는 그 친구를 위해서 자기네 엄마 아빠도 모르는 일 하나를 혼자서 은밀히 꾸미고 있다. 친구의 몫으로 통장을 하나 만든 것이다. 학교 안에 있는 농협출장소에서 만든 통장인데 지금은 얼마 되지 않지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꼭 1백만 원을 만들겠다고 한다.

"......학교에서 점심과 저녁밥을 다 먹는데 점심은 도시락 싸 가고 저녁 밥값으로 매일 2천 원 정도를 주셔요. 3백 원짜리 빵 하나 먹고 1백 원짜리 요구르트를 마시면 그 남는 돈은 매일 저금해요."

빵 한 개와 요구르트로 저녁을 때우고 친구를 돕기 위해 나머지 돈을 저금한다는 그 착하고 기특한 마음씨에 콧잔등이 찡했다.

그는 <산에는 꽃이 피네>를 다 읽고 나면 그 책을 친구에게 보내주려고 행여 구겨질까 봐 읽을 때에도 활짝 펼치지 않고 30° 각도로만 펴서 읽는다고 했다.


나는 번거로운 왕래를 싫어하고 게을러서 독자의 편지에 대해서 답장을 거의 안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학생의 편지를 받아보고는 즉시 회신을 보냈다. 책을 한 권 서명해 보내면서 이 책은 마음놓고 180° 각도로 활짝 펼쳐 놓고 읽으라고 했다. 그리고 너와 나, 둘이만 마음 속에 담아두자고 하면서 한 가지 약속을 해두었다. 그 친구를 돕기 위해.

요즘처럼 약삭빠른 세태에, 더구나 '학교지옥'에서 말할 수 없이 시달리고 부대끼면서도 친구를 위해 세심하게 마음 쓴, 그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어린 소녀의 우정 앞에 엎드려 절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자나깨나 친구 걱정이다. 친구를 사랑하는 그 순수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인해, 학교에서 억압과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이 지나온 생애의 과정에도 한때는 그와 같은 순수한 우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무디어지고 건조해지고 삭막해졌는가. 육신은 비록 세월의 풍상에 씻겨 구겨졌을지라도 젊은 날에 지녔던 순수한 그 우정을 잃지 않고 꾸준히 가꾸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우리가 부러워하고 우러러야 할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가꾼 삶의 서늘한 그늘을 메마른 이웃의 뜰에 내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998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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