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스크랩] (31) 아름다움 - 낯모르는 누이들에게

문근영 2012. 6. 28. 07:43

법정스님의 모습

아름다움 - 낯모르는 누이들에게


이 글을 읽어 줄 네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슬기롭고 아름다운 소녀이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슬기롭다는 것은 그 사실만 가지고도 커다란 보람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사람을 만나기 위해 종로에 있는 제과점에 들른 일이 있다. 우리 이웃 자리에는 여학생이 대여섯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애들이 깔깔거리며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는 슬퍼지려 했다.

그 까닭은, 고1이나 2쯤 되는 소녀들의 대화치고는 너무 거칠고 야한 때문이었다. 우리말고도 곁에는 다른 손님들이 꽤 있었는데 그 애들은 전혀 이웃을 가리지 않고 마구 떠들어대더구나. 그리고 말씨들이 어찌나 거친지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말씨는 곧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또한 그 말씨에 의해서 인품을 닦아갈 수도 있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 주고받는 말은 우리들의 인격 형성에 꽤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소녀들의 입에서 거칠고 야비한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올 때 어떻게 되겠니? 꽃가지를 스쳐오는 바람결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말만 써도 다 못하고 죽을 우리인데.

언젠가 버스 종점에서 여차장들끼리 주고받는 욕지거리로 시작되는 말을 듣고 나는 하도 불쾌해서 그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고물차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는 골치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욕지거리는 듣는 마음 속까지 상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시궁창에서 썩고 있는 추악한 악취나 다름없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잠시라도 나를 빠지게 할 수 없었다.

욕지거리가 인간의 대화로 통용되고 있는 요즘 세상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했거나 생활 환경이 무질서한 그런 애들과는 달라야 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큰 보람'이란 말을 앞에서 했다. 그럼 아름다움이란 뭘까. 밖에서 문지르고 발라 그럴듯하게 치장해 놓은 게 아름다움은 물론 아니다. 그건 눈속임이지. 그건 이내 지워지고 만다. 아름다움이 영원한 기쁨이라면 그건 결코 일시적인 겉치레일 수 없어, 두고 볼수록 새롭게 피어나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하나의 발견일 수도 있어. 투명한 눈에만 비치기 때문이다.

나는 미스 코리아라든지 미스 유니버스 따위를 아름다움으로 신용할 수 없어. 그들에게는 잡지의 표지나 사진관 앞에 걸린 사진처럼 혼이 없기 때문이야. 아름다움을 정치처럼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보다는 모독하고 있는 거야. 아름다움이란 겉치레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품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움이라면 거죽만을 보려는 맹점이 있어. 그래서 아름답게 보이려고 갖은 수고를 다한다. 값진 화장품을 써야 하고, 사람이 먹기도 어려운 우유에 목욕을 하는가 하면 무슨무슨 운동을 하고, 값비싼 옷을 해 입어야 하고...... .

그들은 모르고 있어. 감추는 데서 오히려 나타난다는 예술의 비법을. 현대인들은 그저 나타나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감추는 일을 망각하고 있어. 겉치레에만 정신을 파느라고 속을 다스릴 줄 모른단 말이야. 이런 점은 우리 춘향이나 심청이한테 배워야 할거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누구에게 보이기 전에 스스로 나타나는 법이거든. 꽃에서 향기가 저절로 번져 나오듯.

어떤 시인의 말인데, 꽃과 새와 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청결한 기쁨을 우리에게 베풀어준다는 거야. 그러나 그 꽃은 누굴 위해 핀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기쁨과 생명의 힘으로 피어난 것이래. 숲 속의 새들도 자기의 자유스런 마음에서 지저귀고 밤하늘의 별들도 스스로 뿜어지는 자기 빛을 우리 마음에 던질 뿐이란 거야. 그들은 우리 인간을 위한 활동으로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안에 이미 잉태된 큰 힘의 뜻을 받들어 넘치는 기쁨 속에 피고 지저귀고 빛나는 것이래.

이와 같이 아름다움은 안에서 번져 나오는 거다. 맑고 투명한 얼이 안에서 밖으로 번져 나와야 한단 말이다.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어째서 그럴까. 서로 뒤바꾸지 않게 알아볼 수 있도록 어떤 보이지 않은 손이 그렇게 빚어 놓은 것일까? 아니고 말고. 그건 저마다 하는 짓이 달라서 그런 거지.

얼굴이란 말의 근원이 얼의 꼴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얼굴 모습은 곧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일 거다. 아름다운 얼굴은 지금까지 아름다운 행위를 통해 아름답게 얼을 가꾸어 와서 그럴 거고, 추한 얼굴은 추한 행위만을 쌓아 왔기 때문에 그럴 거야. 그렇다면 아름답고 추한 것은 나 아닌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내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그러한 꼴(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이, 욕지거리를 잘하는 미인을 상상할 수 있겠어? 그건 결코 미인이 아니야. 그리고 속이 빈 미인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또한 슬기로움과 서로 이어져야 한다. 슬기로움은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거든. 순수한 집중을 통해 자기 안에 지닌 빛이 발하는 거지.

나는 네가 시험 점수나 가지고 벌벌 떠는 그런 소녀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물론 골빈당이 되어서도 안 된다. 네가 있음으로 해서 네 이웃이 환해지고 향기로워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소녀라는 말은 순결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슬기로운 본질을 가꾸는 인생의 앳된 시절을 뜻한다.

너의 하루하루가 너를 형성한다. 그리고 머지 않아 한 가정을, 지붕 밑의 온도를 형성할 것이다. 또한 그 온도는 이웃으로 번져 한 사회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너의 '있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누이야, 이 살벌하고 어두운 세상이 너의 청정한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되도록 부디 슬기로워지거라. 네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라. 그것이 곧 너 자신일 거다.

1971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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