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충무공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문근영 2012. 2. 26. 09:29

 

  한산도 제승당 수루(戍樓)

 

 

  뱃깅 선상에서 본 통영 미륵산,  정상 바로아래에  케이블카 종점이 흉물처럼 보인다.

 

 제승당 앞 바다에 들어서면 돌로 된 거북선. 이 거북등대는 1963년 지역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서 한산대첩 해전지 바다에

 거북선형태의 조각을 만들어 암초(바다 밑에 숨어 있는 바위. 물이 많이 빠지면 바위가 드러날 때도 있음) 위에다 세운 것.

 산위 산 정상에는 한산대첩비(1976년)가 세워져있다.

 

  제승당 선착장 진입중인 통영-한산도제승당을 오가는 뉴파라다이스

 

  제승당으로 들어가는 노변에 설치된 음수대

 

 한산문

 

 한산문을 지나면 바다물건너 제승당이 자리한 숲이나타난다.

 

 

 대첩문앞 켠의 충무공께서 거주하면서 드셨던 우물. 1340일 동안 군사들과 함께 사용한 우물이라한다.

 

  대첩문

 

  충무문

 

제승당(制勝堂) 이라는 편액의 휘호는

제108대(代) 통제사(1737~1739년) 조경(趙儆)이 수(水)인(因)지(地)이(而) 제(制)류(流)하고 병(兵)인(因)적(的)이(而) 제(制)승(勝)

물은 그 지형(생긴 대로) 따라 흐르고 병사(적)는 그 형편 따라 제압한다---이라는 손자병법(본명: 손무)에서 따왔다고 한다.

 

 

 

 제승당 안에 있는 제승당 현판의 글씨는 140대(1786년) 김영수라는 통제사가 71세 때 쓴 것이라 한다.

 

 제승당 정면 주련: 수(水)국(國)추(秋)광(光)모(暮): 넓은 바다에 가을햇빛 저무는데

                         경(驚)한(寒)안(雁)진(陳)고(高);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떼 하늘 높이 날아가네

                         우(憂)심(心)전(輾)전(轉)야(夜);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드는 밤

                         잔(殘)월(月)조(照)궁(弓)도(刀): 새벽달은 무심코 칼과 활을 비추네.

 

 

 

 욕일보천(浴日補天)은 경(經)천(天)위(緯)지(地)지(之)재(才), 보(補)천(天)욕(浴)일(日)지(之)공(功)에서 나온 말.  

 맹산서해(盟山誓海)는 서(誓)해(海)어(魚)룡(龍)동(動), 맹(盟)산(山)초(草)목(木)지(知) 라는 말.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충무공이 반드시 임금의 원수를 갚을 것을 “바다에 다짐하니

                          어룡이 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더라“는 뜻이다. 충무공의 검에 새겨져 있었다는 글귀다.

 

 후손통제사행적비 비각

 

 후손통제사행적비 비각내의 비

1) 第122代 이태상(李泰祥)  5代孫  癸未七月 日(1763년立)   근무:1760.8~1762.6,  1701년생, 1728병과급제, 자:내숙來淑, 

                                      남해 설천면 노량리 충렬사옆에 이태상비有 청해루를 건립하였음.
2) 第139代 통제사 이한창(李漢昌) 1783~1784  6代孫  甲辰四月 日(1784년立)
3) 第173代 가선대부삼도통제사 이승권(李升權)  8代孫 1841년 근무 파직 庚子十月 日(1840년立)
4)          부사    이태권 8代孫  庚辰二月 日(?1880년立)
5)          가선대부삼도통제사 이규ㅁ 己卯二月 日  (1879년)
6) 第199代 가선대부삼도통제사 이규석(李奎奭) 숭정後四庚辰(1880년)    자: 군백. 1879(고종16)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 공조판서.
7) 第204代 자헌대부삼도통제사 이규안(李奎顔)  10代孫 丁亥四月 日(1887년立)    1886년삼도수군통제사역임
 ※  第 36代 삼도수군통제사의 기록이 부정확하여 제37대에서 부터는 한대씩 차이가나기도함. 최종통제사: 제208대또는 제209대 홍남주

 

 

 수루(戍樓)

 

 

 

(조경 통제사의 유허비문 내용)

‘어허 여기는 이 장군 순신의 제승당 터다. 바로 그가 이 집에 앉아 지휘하고 호령할 제 천지귀신도 그 정성을 굽어보고 바람 구름 번개 비가 그의 응변 술책을 도와 왜적들이 바다에 깔려 날뛰면서도 이 집 밖에서만 웅성거리지 차마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는 못했던 것이니 어찌 그리 장하시고 이제 다시 수 백 년이지나 주춧돌은 옮겨지고 우물과 부엌마저 메워졌건만 아득한 파도 너머 우거진 송백 속에 어부와 초동들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제승당 옛터를 가리켜 주니 백성들은 이 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지 못하나 보다. 슬프다, 옛날 주나라 소공이 이 막을 잠깐 쳤던 자리라고 거기 나는 아가위나무 한 가지도 베지 말라는 노래를 지어 만고에 읊조리거늘 사직을 바로잡고 우리 창생을 살리심이 그 누구 힘이 관대 차마 이 자리에 풀이 우거져 있게 할 까 보냐.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지나가 차츰 더 아득해지면 저 어부와 목동들마저 집터를 잊어 버려 물어 볼 곳조차 없어질는지 그 또한 누가 알리요. 그래서 이제 통제공조경이 흙을 쌓아 터를 돋우고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는 뜻은 실로 여기를 표해 두자는 때문이니 어허 인제는 천하 만세에 여기가 이 장군 집 터였던 줄을 알게 되리라. 이제 군자 이르되 통제공조경은 과연 능히 임금을 섬기는 분이라 하리니 그 어른을 사모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비를 세울 것이며 진실로 사모하는지라 반드시 본받을 것이며 진실로 본받은지라 반드시 충성되고 의로울 것이며 충성되고 의로운지라 임금을 섬길 따름 다른 무엇이 있을까 보냐. 여기 이 비를 세우고 글씨를 쓴 이는 통제사 조경이요 글을 지은이는 도사 정기안 이다. ’1979년 12월 이은상 국역, 고동주 글씨

 

 

 조경 통제사의 유허비가 묻혔던 곳은 구(舊)비(碑)매(埋)처(處)라고 짧은 비석 돌이 세워져 있다.

 

 

  리충무공계시던제승당의터다.  일중 김충현 書

 홍살문

 

 내삼문

 

 

 충무사

 

 이충무공 영정: 정형모화백의 그림으로 1976년에  봉안.

 

  한산정

 

  정자에서 활판과녁이 보인다.

 

 활터 과녁판: 충무공께서 부하들과 바다 건너 쪽에 과녁을 세워 두고 활쏘기 시합이나 연습을 하였다는 곳이다.

                   명중이 되면 붉은 깃발을 올려 들어 줬으며 빗나갔을 때는 징을 한 번 울렸다 한다.

                   과녁까지의 거리는 150여m인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연습함으로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하여 수련하므로

                   거리감을 익혀 실전에 매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한산도(閑山島) 제승당(制勝堂) 사적 제113호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이순신(李舜臣) 1545(인종1)~1598(선조31) 자: 여해(汝諧), 시호: 충무, 한양출신, 1579년 병과로 급제,

1592년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 13척을 분쇄, 1593년 한산도로 옮겨 本營으로 삼고 최초의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 원균이 정유재란에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 중 유탄에 맞아 전사. 장지는 아산의 어라산.

 

 

 

 

 

출처 : 참 나를 찾아 산사로의 여행
글쓴이 : 木 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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