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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 속에서 스승을 다시 찾아야 [금장태]

문근영 2012. 1. 13. 07:37

 
제 254 호
역사 속에서 스승을 다시 찾아야
금 장 태(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정조임금은 퇴계를 존숭하는 마음이 깊어 멀리 경상도 산골, 예안(禮安)으로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도산서원과 가묘(家廟)에서 제사를 드리게 했다. 특히 1792년 3월에는 규장각의 이만수(李晩秀)를 예관으로 파견하여 도산서원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고, 그 다음날 도산서원 앞에서 영남 선비들에게 과거시험을 보게 하는 특별한 은전을 내렸던 일이 있었다. 서원 앞 넓게 터진 강변에는 응시하러 온 선비들과 구경나온 백성들까지 수만 명이 모여들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때 과거시험장에 참석했던 영남지역 선비들만 7,228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도산서원 앞에서 영남선비들에게 특별히 과거시험의 기회를 열어주었던 것은 당쟁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영남인의 소외감을 어루만져주려는 정조의 노련한 정치적 포석이기도 했다. 당시의 나라 상황은 당쟁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신분과 지역의 차별로 일그러진 채 서양 종교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일부에서는 제사를 폐지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사회의 유교 질서가 뿌리채 흔들리는 심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정조임금은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고 동요하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정신적 구심점을 찾았던 것이다. 바로 그 구심점으로서의 퇴계를 높임으로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이상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라 보인다. 명분만 그럴듯하고 실제는 권력과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과 분열을 일삼는 정치 현실에 절망한 백성들에게, 진실과 희망의 불빛으로 역사 속의 스승을 높이 띄워 올리려 했던 것이 통치자로서 정조의 깊은 뜻이 아니었을까.

스승을 높이며, 백성 곁으로 다가선 정조

1796년 9월에 퇴계의 9대 종손 이지순(李志淳)이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의 현령으로 부임하게 되자, 퇴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서울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정조임금은 퇴계가 생전에 서울을 떠난 뒤 227년 만에 그의 신주가 서울을 지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성균관의 대학생들에게 격식대로 복장을 갖추고 길 양쪽에 줄지어 서서 퇴계의 신주를 공경하게 맞이하도록 지시하였다. 그것만으로 미진하였는지 예관(禮官)을 파견해 학생들의 대열을 관장함으로써 그 행사가 성대하게 보이게 하도록 예조(禮曹)에 분부하였다.

그러고서 다시 정2품관인 성균관 지사(知事)가 퇴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일을 주관하도록 지시하고, 전직, 현직의 규장각 신료들과 승정원의 신료들에게 모두 제사에 참례(參禮)하게 하였다. 마침내 퇴계의 신주가 서울 성안으로 들어오는 날이 되자, 정조임금은 왕명으로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하여금 백관과 유생들을 인솔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때 제사에 참석한 조정의 관리와 대학생 등이 1,000여 명에 이르는 성대한 의례였다. 또한 퇴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릴 때 정조임금 자신도 창경궁 동북쪽의 궁문인 월근문(月覲門)까지 나가서 퇴계를 존숭하는 뜻을 극진하게 표현하였다. 또한 신주가 지나갈 때 구경을 하던 부녀자들이나 아이들까지도 모두 “우리 선생이 여기 지나가신다”고 하면서, 서로 다투어 길가에 엎드려서 맞이하고 전송하는 예의를 차렸다고 한다.  퇴계를 존경하는 마음이 백성들 속에 얼마나 깊이 침투했으며, 그 영향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우리 시대의 참 스승을 찾아야····

정조임금은 퇴계의 신주를 맞이하는 행사의 규모를 점점 높여가면서 마지막에는 정승이 조정의 백관과 대학생들을 거느리고 제사를 드리게 하는 국가적 행사로 격을 높였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더욱 높이고 싶어지는 인물, 높이면 높일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충만하게 해주는 인격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와 그 백성들을 위해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우리사회에는 영웅이나 위인의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우승을 거듭하는 운동선수나 인기가 치솟는 연예인에 대해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를 헤쳐 나가는데 길을 비쳐주고 그래서 따르며 본받고 싶은 스승은 잘 보이지 않고 있다. 대학교정에는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젊은 투사들의 흉상과 추념조각물은 있어도 그 대학의 학문을 이끌어 갔던 학자의 흉상은 어디에도 없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 대학의 한계가 보이는 것 같아 씁쓸했던 일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이 훌륭한 학자가 없는 황량한 대학도 아니요, 우리 역사도 위대한 인물이 전혀 없는 공허한 역사가 아닌데, 왜 망각 속에 묻어두고 돌아보지 않는 것일까. 눈앞의 변화에 너무 휘둘리다가 과거도 미래도 안 보이는 심한 시각장애에 빠진 것이나 아닌지. 정조임금이 퇴계를 높였던 그 마음은 지금 우리가 잊고 있던 스승,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스승을 다시 찾도록 눈을 크게 뜨게 해주는 좋은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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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금장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저서 :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이끌리오, 2005
         『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퇴계의 삶과 철학』,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다산 정약용』,살림, 2005
         『다산 실학 탐구』, 소학사, 2001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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