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스크랩] 살아있는것은 다행복하라 -끝-

문근영 2012. 1. 4. 07:33

한 여인이 있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서 그녀는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우리와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막 그녀는 죽은 아들을 위한 49제를 마쳤다. 그리고 절 주지의 안내로 방으로 들어와 우리와 합석을 했다. 그녀의 존재 전체가 슬픔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아들은 외국 유학을 마치고 군 입대를 준비하던 중, 어느 날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는 돌연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고통은 그녀의 가슴을 눈물로 가득 채웠다. 그 눈물은 차마 밖으로 흘러나오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녀가 하는 이야기, 음식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까지도 울음 그 자체였다. 슬픔이 깊으면 모든 동작이 울음이 된다.

밥을 먹다 말고 내가 법정 스님을 돌아보았다. 나는 이제쯤 스님이 여인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그 인연만으로 그녀에게 왔다가 간 것이다. 이 우주가 잠시 그녀에게 아들을 맡겼다가 데리고 간 것일 뿐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 스님이 그렇게 여인을 위로하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묵묵히 식사를 하면서 그녀 앞으로 반찬을 끌어다 주기도 하고 어서 먹으라고 권할 뿐이었다. 여인은 계속해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스님은 귀를 기울여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또 연신 다른 반찬을 그녀 앞으로 옮겨다 놓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화학 작용이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지 않았지만, 분명 여인의 얼굴 어딘가에 안정과 평화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눈물로 일렁이던 바다에 한 줄기 평화로운 빛이 스며들어 물결이 그 빛을 반사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이 어떤 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법정 스님이 가진 현존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좀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그때 스님은 단 한순간도 그 여인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실 그 자리에는 모처럼 산을 내려온 그를 만나기 위해 여러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투명한 오라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그는 한순간도 그 여인에게서 눈과 귀를 떼지 않았다. 바로 옆에 앉은 나조차도 그곳에 끼어들거나 방해할 수가 없었다. 그 강렬한 집중이 아마도 그녀의 슬픔을 위로하고, 나아가 그것을 삶의 한계에 대한 이해로 승화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그의 모습은 마치 고통받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 분위기의 신성함이 서서히 그녀를 슬픔 밖으로 인도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와 초봄의 햇빛 가득한 절마당을 걸어가고 있을 때, 여전히 법정 스님 옆에서 걷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채로 밝은 기색이 역력했다. 죽어가던 영혼은 그렇게 다시 소생의 순간을 맞이했따. 눈에는 눈물이 어려있었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상처를 위로 받은 이의 안도와 감사의 눈물이 섞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아파하는 친구들, 이웃들 앞에서 그들에게 얼마나 집중하였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혹여 그들 앞에서 잘난 척하지는 않았는지, 섣부른 충고와 위로를 하지는 않았는지?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몫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과정이며, 소유욕을 채우기 위해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소유하려고 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전 세계적으로 소비 지향적인 단일 문화를 이루고 있는 이 새다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소유와 소비로부터 그 정신이 깨어 있아여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기 된다.' 는 것은 진리이다. ... '

- 서문에서, 류시화-

출처 : 대구문학신문 - 시야 시야
글쓴이 : 노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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