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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사 없는 실록 [강명관]

문근영 2011. 12. 8. 07:27

제 249 호
기사 없는 실록
강 명 관(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참고할 것이 있어 『헌종실록』 『철종실록』을 볼 때면,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이전의 『실록』은 기사가 없는 날이 없다. 예컨대 『정조실록』의 경우 기사가 너무 많아서 번거롭다고 느낄 때도 있다. 기사 중 가장 많은 것은 상소문이고, 그 중 또 많은 것은 대간(臺諫)이 올린 것이다. 대간은 어떤 사건에 대해 자신이 얻은 정보를 주워섬기고 논리를 구성한다. 그것이 당파적 이해에 관계된 것이라 해도, 어쨌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다. 반대의 당파 역시 그렇게 한다. 이게 정상이다.

한데 어쩐 일인지 『헌종실록』 『철종실록』을 보면, 기사 자체가 아주 적고, 대간의 발언도 그리 많지 않다. 있는 기사라고 해 봐야 거개 한두 줄에 불과하다. 심지어는 아무런 기사도 없는 날이 이어지기도 한다. 갑자, 을축, 병인 …… 따위의 간지(干支)만 써 놓고 그 아래에 단 한 자의 글자도 없는 것이다. 『실록』 번역에는 나 역시 참여한 적이 있는데, 이런 경우 간지만 10번 쓰고 원고지 한 장을 채우게 되어, 때로는 횡재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헌종,철종시대 세도정치는 대간의 입을 닫아버리더니....

어쨌거나 『헌종실록』 『철종실록』을 보면 태평성대가 따로 없다.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으니 아무 사건도, 아무 문제도 없이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진실일 리 없다. 헌종·철종 때라고 해서 사건이 없었을 리 만무하고, 문제가 없었을 리도 만무하다. 아니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백성들의 살림이 그 시대보다 더 어려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록』의 공적인 기록에 남지 않았다. 

더욱 궁금한 것은 정조 때까지 그렇게 격렬한 상소문을 올리던 신하들, 특히 대간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의정부와 육조, 그리고 사헌부와 사간원이 없어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육조 판서는 없어지지 않았고, 양사(兩司)의 헌관(憲官)과 간관(諫官)도 멀쩡히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은 있었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다시피 헌종·철종 시대는 풍양조씨와 안동김씨 세도가 있었다. 세도정치란 한 가문이 국가권력을 독점한 정치 형태다. 조씨와 김씨는 왕보다 더 큰 권력을 쥐고, 국가를 사유화했던 것이다. 자기 당파, 자기 집안사람들에게만 노른자위 관직을 주었고 또 팔아먹었으며, 거기다 그 관직을 얻거나 사들인 자들은 백성을 쥐어짜고! 그렇게 19세기 조선은 병들어 갔다.

그런데도 『실록』에 별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그것을 절실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간은 왕권과 관료에 대해 비판하고, 정치의 득실을 따져 말하는 것이 그들의 고유한 임무였다. 하지만 헌종·철종 때의 대간이란 세도가문의 출신이거나, 세도가문의 구미에 맞는 자들이었으니, 무슨 비판할 능력과 의사가 있었겠는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백성들 살림이 절단이 나든,그것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실록』에 쓸 것이 없었을 것이다. 

요즘 방송과 신문의 뉴스를 보면 그때가 떠올라

지금 시대의 방송과 신문은 비판적 기능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대간의 역할과 같다. 하지만 방송의 뉴스나 신문의 지면을 보면, 마치 헌종․철종 시대의 대간과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근자에 TV의 9시 뉴스를 보았더니, 사회적으로 엄청난 함의를 갖는 사건은 중간에 잠시 나오는 둥 마는 둥 얼핏 보이다가 금새 사라지고, 들으나 마나 한 뉴스는 시시콜콜 자세히도 다루고 있었다(하긴 이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신문 역시 마찬가지다. 부수가 많고 영향력이 크다는 신문일수록 이상하게도, 중요한 뉴스는 저 구석에 가 있고 기사의 크기도 작다. 정말 모를 일이다. 21세기에 헌종과 철종 시대 대간의 모습을 보다니!

다산은 「직관론(職官論)」에서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해지려면, 관각(館閣)과 대간(臺諫)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 방송과 신문의 뉴스를 보다가, 엉뚱하게도 기사 없는 『헌종실록』 『철종실록』을 떠올리며, 다산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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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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