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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1812년에 쓴 민보의(民堡議)는 조선시대판 예비군 혹은 민방위제도를 제안한 책으로 유명하다. 주민들이 거주지역을 스스로 방어하는 제도를 제안하고 있는 민보의는 민ㆍ군 구분 없는 총력방어체제의 한 모델로 의미가 매우 크다.
다만 민보의는 하나의 아이디어 차원에서 멈췄을 뿐 실제 국가 정책으로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은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민보의에 나오는 민ㆍ군 총력방어체제 구상은 19세기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특히 19세기에 쓰인 국방ㆍ안보 관련 서적 중에서 어초문답·민보집설·민보신편 등 다수 서적이 모두 정약용의 주장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은 민보의의 사회적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이들 서적 중에서도 민보집설(民堡輯說ㆍ사진)은 매우 중요한 책으로 간주된다.
아이디어에서 멈춘 민보의와는 달리 민보집설은 실제 국가정책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 이후 조선에서는 국방태세 강화가 국가적 화두가 됐다.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아이디어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정약용의 민보의에 바탕을 둔 민보(民堡) 체제도 거론이 된 것.
민보 체제를 조정에 정식으로 건의한 주인공은 신관호(일명 신헌ㆍ1810~1884)였다. 신관호는 조선 후기 훈련대장을 지낸 신홍주의 손자로 전형적인 무관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신관호는 전라우수사와 전라병사를 거쳐 이미 1849년에 금위대장을 역임했고 1861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지냈다.
병인양요 직후에는 가장 중요한 중앙군부대인 훈련도감의 지휘관인 훈국대장에 올랐다. 신관호가 민보 체제를 조정에 건의한 것은 그가 훈국대장이었던 1871년이었다. 수군과 육군의 가중 중요한 보직을 모두 역임한 핵심 무관이 민간인을 지방 방어체제의 중심으로 삼는 민보 체제 도입에 찬성한 것이다.
신관호는 정약용의 학문을 수학했다고 알려져 있고, 개화파인 박규수와도 친분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신관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조선 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했던 의지가 강한 인물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사상적 바탕 위에 당시 조선의 국방태세에 위기감을 느끼고 지역 주민들이 자기 고장의 향토방위에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민보 체제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을 것이다.
신관호가 처음 민보 체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 근해에는 서양 선박들이 수시로 출몰했다.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서양 군함과 상선들이 수시로 나타나자 조선 내부에서도 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같은 안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정약용이 제안한 민보 체제가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고, 신관호도 같은 생각이었다. 마침 신관호가 훈련대장을 지내던 1871년 그가 제안한 민보 체제가 정식으로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고 조정에서 신관호에게 구체적인 자문을 요청하자 그 답으로 내놓은 책이 바로 민보집설이다.
민보집설은 민보의 편제를 다룬 오갑, 민보가 방어거점으로 활용하는 성곽 문제를 다룬 보제, 민보에서 사용할 무기와 장비를 설명하는 보기, 민보에서 준수해야 할 규정을 설명한 보약, 민보의 식량 조달 문제를 다룬 보량 등 다섯 개의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신관호의 민보집설은 정약용의 민보의에 수록된 제안을 더 발전시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 국방제도의 일부분으로 민보 체제를 도입해 정책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집필한 책이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관호의 민보집설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신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89년 정약용의 민보의와 함께 우리말로 번역, 군사문헌집 시리즈 중 제10권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