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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언제부턴가 새해 첫날 해맞이를 하러 산꼭대기나 바닷가를 찾는 일이 부질없게 여겨져 요즘에는 아예 집을 나설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늙었다는 징표일 것이다. 그러고보니 요즘엔 자장면도 맛이 없고, 가끔 새벽 서너 시에 잠이 깨는 수도 있으니, 이 정도면 확실한 노인증후군이 아닐까?
나는 체질적으로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일로매진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새해 첫날 책상머리에 올해의 목표를 써붙여 놓고, 긍정적 사고와 낙관적 전망을 가지려고 자기최면을 거는 인간을 나는 좋아할 수 없다. 그저 피식 웃음이 나올 따름이다. 경험상 그런 인간은 위선자일 뿐만 아니라 조급한 성취욕으로 남을 몰아세우기 일쑤니까.
속고 살아온 탓인지, 가축들의 생매장 탓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나의 습성은 타고난 체질이라기보다는 속고 살아온 세월의 탓이 크다. ‘선진조국’이니 ‘정의사회 구현’이니 ‘747’이니 하는 화사하고 ‘삐까번쩍’하게 치장된 헛된 희망에 휘둘리다가 낙관적 전망이 쓰디쓴 환멸로 바뀌는 일을 수없이 겪다 보니, 일종의 자기보호본능에 의해 그런 습성이 몸에 밴 것 같다. 순박한 농민들도 관에서 시키는대로 했다가 번번이 손해만 보니까, 고추 심으랄 때 배추 심고 배추 심으랄 때 고추 심는 청개구리 심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아무리 냉담하고 신경이 무딘 사람도, 죄없는 가축들이 집단으로 생매장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희망찬 새해 설계를 꿈꿀 수 있단 말인가. 대규모의 공장식 축사에서 사료와 항생제만을 먹여 키우는 가축들을, 병에 걸려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렇게 대량 학살해도 되는 것인가. ‘살처분’이라는 억지스런 용어에서 풍기는 인간의 오만함과 잔혹성에 소름이 끼친다.
불교의 윤회설을 믿지 않더라도 우리시대의 잔혹한 인간들은 나중에 대부분 축생이나 아수라, 아귀, 지옥 같은 데로 떨어질 것 같다. 자연의 순리를 어기고 소에게 동물 사료를 먹이고, 돼지 한 마리를 0.4평의 공간에, 암탉 한 마리를 A4 용지보다 작은 공간에 옴짝달싹 못하게 가둬놓고 대량사육하면서 어떻게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이 죽으면 49재를 지내는데 가축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봉은사를 비롯한 여러 절에서 대량학살된 동물들을 위해 올린 천도재는 나처럼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지금까지의 가축 사육 방식과 육식 문화를 되돌아보고 바꾸는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리였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해맞이는 하지 않았지만 연초에 문경의 봉암사를 다녀온 적은 있다. 22년 전인 1989년 1월 6일, 문경의 봉암사 입구에서 타고 가던 승용차가 개굴창으로 구르는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으나 부처님의 가피로 무사히 살아난 이른바 ‘1∙6구사일생동지회’의 회원들이 다시 작당을 해서 눈길을 헤치고 봉암사를 찾아간 것이었다. 그때처럼 동안거 중인 명진 스님을 만나 잠시 희양산 계곡에 있는 마애불을 참배하며 옛날 기억들을 되살렸다.
아무리 좋은 뜻의 일도 억지로 밀어붙이면
그런데 마애불의 우아한 자태는 서툰 솜씨로 시멘트를 발라 성형을 한 얼굴 때문에 보기가 민망했다. 명진 스님 등 선방 스님들이 그렇게 말렸는데도 당시의 주지 스님이 자기 나름의 소신에 따라 손을 대서 이 모양이 됐다고 한다. 4대강사업처럼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하는 일도 억지로 밀어붙이면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절감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리영희 선생이 쓰시던 만년필을 명진 스님이 물려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생전에 서울의 봉은사를 자주 찾으셨던 리선생이 하루는『전환시대의 논리』등 그의 중요한 원고를 썼던 만년필이라며 스님에게 몽블랑 만년필을 주셨는데 얼떨결에 받고 생각하니 의발을 전수받은 것 같아 영 어깨가 무겁다는 것이었다.
“아니, 스님은 글쟁이가 아니라 말로 ‘썰’을 푸는 라디오 체질인데, 왜 만년필을 주셨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부처님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성인들은 모두 글이 아니라 말로 진리를 설파했잖습니까?” “듣고보니 그렇군요. 예수와 모하메드는 문맹이란 설도 있더군요.” 이렇게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우리는 오는 22일 봉은사에서 봉행되는 리선생의 49재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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