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아직 인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인 모양이다. 벌써 여름의 문턱에 들어 선 듯 숲은 푸르고 들꽃은 앞 다투어 피어난다. 지난 겨울이 그러했듯 아무래도 궤도를 이탈한 조급증에 걸린 계절에 맞춰 부대끼는 생명체들이 조금음 걱정이다. 푸른 섬진강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녹음 속을 헤집고 내리꽂히는 햇빛이 눈부신 것을 보니 여름이 다 된 것 같다.
오랜만에 오산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100대 길이라는 동해의 섬진강을 뒤로 하고 일행 몇이서 도란거리며 오른 것이다. 예전의 키 작은 참나무들이 어느 새 하늘을 가리고 있다. 온 산이 참나무 단일 수종이라 더 푸르고 청량하다. 지그재그 길을 따라 오르며 만나는 너덜겅도 느티나무도 예나 다름없다.
지금은 사성암까지 도로가 열려 쉽게 자동차로 올라 갈 수 있다. 특히 봄철 벚꽃이 섬진강변을 수놓으면 사성암도 덩달아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허름한 기와지붕의 작은 암자가 이제는 규모를 갖춘 법당과 당우들이 세워져 제법 절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초파일이 지난 사성암에는 아직도 연등들이 곱게 매달려 있었다. 바위벼랑에 의지한 절이어서 연등 또한 다른 곳과 달리 벼랑을 타고 수직으로 걸린 것이 이색적이다. 한 낮의 밝은 햇살에 연등 그림자가 바닥에 검을 점을 박고 있다. 사성암은 이제 암자 특유의 조용함이 아닌 세속의 때가 묻은 절이 되어버린 것 같다. 곱게 치장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낙 같이 말이다. 불현듯 예전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김경연 할머니 말이다. |
섬진강에서 바라 본 오산
(정상 부근에 사성암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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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10년 전에 쓴 것을 옮겼습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이 마지막 주말, 사성암에 계시는 김경연 할머니가 보고 싶어 오산을 찾았다. 등산의 어귀에는 이제 갓 피어나기 시작한 개망초와 붉은 볼이 토실토실한 뱀딸기와 풀숲 사이의 꽤풀꽃과 진보라의 엉겅퀴가 곱다.
특유의 밤나무 꽃 냄새를 맡으며 비탈길을 오른다. 초여름 햇볕 아래 뜨거운 열을 내 뿜는 너덜겅을 몇 번 건너 울창한 숲 터널로 들어선다. 뒤돌아보면 연두색 섬진강물이 숲 사이로 반짝인다. 참나무 숲 길섶에는 키 작은 활엽수들이 여린 잎을 펴느라 한창이다.
반 시간 넘어 오르면 제법 우람한 느티나무 아래에 다다른다. 수령이 적게 잡아도 2백년은 실히 될 법한 나무다. 그 누군가가 암자를 찾는 사람들의 땀을 식히기 위해 심었을 터이다.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의 혜안이 고마울 뿐이다. 여기서 짙은 숲 속을 잠시 오르면 사성암 턱 아래 다다른다. 바위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이곳은 그냥 보아도 명당이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 아래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과 구례들이 시원하다.
四聖庵은 백제 성왕 22년(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연기조사는 연곡사와 화엄사를 창건한 분이어서 스님의 후광을 업고자 차용해 온 것 같다. 확실한 기록도 없는 채 연기조사와 원효대사, 도선국사와 고려시대 진각대사까지 수도를 했다며 사성암이라 이름 했으니 절집 역사 한번 거창하게 붙여 만듦이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살이 오른 스님 같지 않는 스님에게 물으니 치매 현상이 있어 아랫마을로 내려가셨단다. 젊은 시절에는 아래 마을에서 쌀 한 가마(40Kg)를 머리에 이고 사성암을 오르셨다는 기골이 장대하신 분이다. 여자이기보다는 남자상이었지만 성품은 온화하고 자상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다 내어주었던 분이다. 가끔 먹을 것을 사들고 할머니를 찾을 때면 삶은 고구마나 전피를 한 움큼씩 주시곤 했다. 그런 할머니가 파란 만장한 삶의 마지막 장을 이렇게 보내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할머니께서는 27살에 두 살 위인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와서 함께 부처님 시중을 들며 살았단다. 그러다 6.25를 만났고 그 와중에 낮과 밤이 달라지는 이념의 갈등 속에서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빨치산이 돌아가면 암자를 점거하던 와중에 남편을 잃은 것이다. 떠나간 남편의 뒤를 이어 암자를 관리하면서 정통 불교보다는 산신각 같은 토속 불국토를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보시행의 일생이 연륜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어느새 암자 주변에 등산 출입 금지 표말을 세우고 실금을 처서 정상 길을 막아 두었다. 상봉에 가기 위해서는 다시 비탈길을 타고 산허리를 돌아야 한다. 할머니가 가신 후유증이나 보다. 새로 열어 논 비탈길을 따라 숲을 헤치고 올라서면 정상이다. 정상은 험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사위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벼랑을 타고 내려 암자 뒤로 돌아가면 절경이 펼쳐진다. 유장하게 흐르는 섬진강과 잘 정리된 구례들과 건너편으로 장엄한 지리능선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곳이다. 가슴이 툭 터지며 등골까지 시원해진다. 작은 산에 이런 절경이 또 어디 있을까 싶지 않다. 오산에 오르고 싶어 하는 까닭은 바로 이곳을 찾기 위함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오산 제일경인 곳이다.
뒤돌아 낡은 법당 마루에 앉아 본다. 반들거리던 마루가 조금 낯설다. 할머니가 안 계신 절집은 찬바람이 도는 것 같다. 금방 함지박에 삶은 고구마를 들고 나오실 것 같다. 이제는 이 오산을 찾을 까닭이 없다. 할머니가 안 계신 이곳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마을에 내려와 김경연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치매라 해서 염려하였으나 치매는 아닌 것 같다. 귀가 어두워 말을 잘 못 알아듣고 백내장이 심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을 하신다. 그러면서도 암자에서 밀려난 이야기를 할 때면 눈빛이 곧추섰다. 사성암을 화엄사 말사로 등록 시키더니 비워 달라 하더란다. 끝내 비켜주지 않으니 어느 날 힘센 장정들이 떼 메고 이곳 골방에 두고 갔단다.
할머니는 나의 손을 당겨 마을 모퉁이를 돌아가더니 오산이 보이는 공지에서 사성암을 향해 한없이 절을 하며 손을 비벼댔다. 오산은 이 할머니에게 신앙이자 안식처이며 마지막 돌아가고 싶은 행복한 땅이자 구원의 땅인 것이다. 구부정한 등과 야윈 손과 세어진 머리칼이 지나온 그이의 삶의 궤적을 선명하게 말해주었다. 저이의 가슴속에 오산은 무엇이며 젊어서 사별한 그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도 사성암은 김경연 할머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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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는 이 글을 쓴 1년 후 돌아가셨다. 아마 오산의 혼령이되어 사성암을 지키고 있는 줄도 모른다. 생전에 사진 찍기를 싫어하셔서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으셨다. 몰래 찍어 두었어야 하는 건데 지금 생각하니 무척 후회스럽니다. 김경언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2007.
5. 31. Forman
♥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5. 26. 촬영)
♣ 저의 홈페이지 '숲과 사람'(forman.pe.kr)에 가시면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정 홍
택 (011-608-9505) 산, 숲, 야생화, 아름다운 자연 속에 꿈과 희망을~~!! 저의 홈페이지 숲과사람 (forman.pe.kr)에 오시면 아름다운 삶과 자연이 펼쳐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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