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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정신의 산물, 《현산어보》
이 태 원(세화고 교사)
《현산어보》는 약 200년 전에 완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서적이다. 흑산도 근해의 수많은 해양생물들에 대한 자세하고 정확한 기록과 묘사는 요즘의 과학자들도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다. 이 책은 16년간의 유배생활이라는 극한의 고통을 딛고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더한다. 해양생물에 대해 거의 무지했던 그가 이 책을 쓰려고 결심한 까닭은 무엇일까. 《현산어보》의 서문에 그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현산 바다에 사는 어족들은 매우 풍부하지만 그 이름이 알려진 것은 희귀하여 박물학자들은 마땅히 살펴보아야 할 곳이다.”
사방이 바다에 면한 흑산도에는 해산물이 풍부했다. 어린 시절 물고기잡이의 경험, 박학다식한 이익으로부터 이어받은 박물학의 정신이 그를 바닷가로 이끌고 눈앞에 살아 숨쉬는 생물들의 이름을 알아내도록 충동했으리라. 정약전은 생물들을 직접 관찰하고 해부를 해 가며 한 종 한 종을 규명해나갔다. 거의 절대적이었던 중국의 고문헌도 그의 엄밀한 해부도에 오르면 쾌도난마, 허황된 이론은 버틸 수 없었다. 실사구시. 실제가 저마다 진리라고 떠드는 이론을 압도하며, 문헌보다는 엄정한 관찰이 진실을 말해준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섬사람 창대는 이 작업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다.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관찰력, 과학적인 사고방 법을 고루 갖춘 이인을 만난 것은 정약전으로서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박물학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학풍 정약전이 단순히 개인적인 호기심만으로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는 새로운 학풍이 기지개를 켜던 때였다. 이른바 진경시대를 맞아 더욱 높아진 민족의식과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생물 하나라도 가벼이 볼 수 없게 했다. 변방의 조그만 외딴섬에서 민초들이 부르던 방언 하나도 큰 의미로 다가왔을 것 이다.
“이 책은 치병(治病), 이용(利用), 이재(理財)를 따지는 집안에 있어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물음에 답하는 자료가 되리라.”
정약전은 실생활과 괴리된 학문과 이론을 좇는 공상가가 아니었다. 이용후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었기에 주민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 분야를 내버려둘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해산물을 이용하고, 학자들의 실제적인 연구에 도움을 주자는 데에까지 관심사를 넓혀 갔다. 결국 정약전은 지적인 관심 위에 실리를 추구했던 것이다.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의 실학자들이 가졌던 생각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인들도 이를 활용한다면 비유를 써서 자기의 뜻을 나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미치지 못한 것까지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약전은 서문의 말미에서 난데없이 시인을 들먹이고 있다. 대체 《현산어보》가 시를 짓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용후생과 문학의 주체성을 위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주성이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 우리 민족의 문학, 우리 민족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보지도 않은 중국의 풍경을 그리는 것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실제 풍경을 그리려는 진경산수화가 탄생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중국의 한시들을 시의 전형으로 보았으며, 중국의 인물,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한 시가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정약전은 이런 시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중국의 시에는 생물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중국의 시인들이 경전으로 삼은 《시경》만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동식물을 담고 있어 책에 등장하는 생물들만 따로 설명하는 책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 시에 나오는 생물들은 중국의 생물들이지 우리나라의 생물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시인들은 늘 중국을 모방하여 중국 시에 등장하는 생물들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우리나라에 비슷한 종이 있으면 중국 이름을 대충 갖다 붙이고,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생물이라도 중국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으면 시에 사용하기를 꺼렸다.
정약전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시를 쓰는 데 괜히 있지도 않은 중국의 생물을 찾는 대신 우리나라에 있는 생물들을 소재로 삼는다면 더욱 조선적인 시를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각 생물의 특징까지 상세히 밝혀놓았으니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으리라. 정약전은 《현산어보》를 통해 주체적인 문학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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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태원 · 세화고등학교 생물 교사 · 저서 : 『현산어보를 찾아서』전5권, 청어람미디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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