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백제의 초도 하남위례성은 직산위례성”>

문근영 2010. 10. 15. 09:11
[제1회 '민족광장 산악회']

- 창립등반대회 및 시산제 -

 
 
 

❖ 일시 : 2008.  3.  9.
❖ 장소 : 위례성 / 청룡사
 

 

 

 


<“백제의 초도 하남위례성은 직산위례성”>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三國史記』 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등 여러 사서(史書)에 백제가 처음으로 도읍한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 王歷編」 백제 시조란에
“百濟 第一 溫祚王 東明 第三子。 一云 第二。 癸卯〔立〕。在位 四十五。都 慰禮城。 一云 蛇川。 今 稷山。 丙辰 移都 漢山。 今 廣州
[첫번째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아들 또는 둘째아들이다. 계묘년(서기전 18)에 나라를 세우고 45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위례성 또는 사천에 도읍하였는데 지금의 직산이다. 병진년(서기전 5)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광주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충남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에 있는 위례산이 바로 백제의 초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인 것이 증명되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직산현조와 광주목조에도 백제의 온조왕이 직산의 위례성에 나라를 열고 도읍을 하였고, 온조왕 13년 위례성에서 남한산성이 있는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다시 근초고왕 26년에 남평양(今 京都, 오늘날의 서울)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직산위례성은 역사적 사실의 현장임에 틀림없다.

특히 우리나라 어느 지명에도 ‘위례성(산)’이라 불리는 곳이 없는 것으로 보아도 백제의 초도읍지 위례성은 현재 입장면의 위례산성을 중심으로 한 북면‧목천읍과 성거읍‧직산읍‧성환읍을 비롯한 그 주변이었음에 틀림없다.

역사적 사실을 주장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문헌이나 유물․유적을 중심으로 고증하는 방법을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고려해야 할 점이 일반상식적인 안목으로 종합해보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망국의 역사인 백제사의 첫 장인 초도읍지 위례성은 13년간이라는 짧은 기간, 그것도 고구려에서 준비 없이 갑자기 도망 온 처지에서 작은 규모로 어렵사리 나라를 세우기 시작한 사정임을 고려할 때, 남아 있는 유물과 유적이 빈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이 공백을 다방면의 주변학문을 통하여 보완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 동안 사학계에서 여러 학설로 논의돼왔던 백제의 초도읍지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우선 상식에 비롯하여 여러 문헌과 유물․유적, 지형, 고유지명, 민속, 지명과 지명설화, 성씨관계인 족보, 국문학과 언어학 등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를 하여 오늘날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운용리에 있는 위례산성과 그 일대라고 증명하고자 한다.

1. 문헌으로 볼 때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고찰해본 결과 정약용(丁若鏞)․이병도(李丙燾)․천관우(千寬宇)․윤무병(尹武炳)․김용국(金용국) 등은 경기도 광주 고읍인 춘궁리(春宮里) 일대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김정학(金廷鶴)․이형구(李亨求) 등은 풍납토성으로 보고, 이기백(李基白)․김원룡(金元龍)․성주탁(成周鐸)․최몽룡(崔夢龍) 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 비정하고 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전라북도 익산(益山), 만주 금주(錦州), 중국 북경, 산동반도가 백제의 초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특히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토대로 여러 문헌자료를 종합해 볼 때 백제의 초도읍지 위례성의 위치가 오늘날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호당와 북면 운용리에 걸쳐 있는 위례산성이며, 이 일대가 사실상 백제의 첫 터전인 하남위례성에 틀림없다.

(1)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사기』 권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조에 보면,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다.
 
고구려에 살던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태자인 비류(孺留)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어머니 소서노(召西奴)와 오간(烏干)․마려(馬藜) 등 열 사람의 신하(十臣)를 비롯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떠나니 그를 따르는 백성이 많아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로 거지(居地)를 정하려고 하니 열 신하가 간하는 말이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을 의거하고 남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기 어려운 천험(天險), 지리(地利)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함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나누어가지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사니,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필을 삼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는 전한 성제(前漢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이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자리 잡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이 즐겨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夫餘)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로 성씨를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유사』 「왕력편 王歷編」 백제 시조란에는 더욱 확실한 기록이 보이는데, “첫번째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아들 또는 둘째아들이다.

계묘년(서기전 18)에 나라를 세우고 45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위례성(또는 蛇川)에 도읍하였는데 지금의 직산이다.
병진년(서기전 5)에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광주이다.”라고 하여 백제의 초도 위례성은 옛 직산, 오늘날 입장의 위례성과 그 일대임이 틀림없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시대의 최고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16 직산현조를 비롯하여 권지6 광주목조에 위례성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 권16 직산현의 건치연혁에 “직산은 본시 위례성으로 백제의 온조왕이 졸본부여로부터 남쪽으로 옮겨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후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빼앗아 사산현으로 고쳐 부르고 신라 때도 그대로 사산현으로 하고 백성군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지금의 이름(직산)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 천안부에 소속시켰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형승(形勝)․사묘(祠廟)․고적에도 한결같이 직산현이 위례성임을 증명하고 있다.
 
- 권6 광주목의 건치연혁에도 “광주는 본시 백제의 한산성이다. 시조 온조왕 13년에 위례성으로부터 옮겨왔고 근초고왕 26년에 또 도읍을 남평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의 기록과 1년의 편차가 있으나 오늘날의 광주로 옮겨오기 이전의 위례성이 입장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4) 기타 향토지

목천읍지인 『대록지 大麓誌』의 서(序)를 비롯하여 『목천현지 木川縣誌』와  『직산현지』의 건치연혁․산천․고적조에도 한결같이 옛 직산현, 현재 입장에 있는 위례성이 백제의 첫 도읍지임을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 확인되고 있다.
 
2. 유물 ․ 유적으로 볼 때

(1) 위례성

『동국여지승람』 직산현조에 성의 둘레는 1,690자(약 512m), 높이는 8자(약 1,82m)인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답사해보면 토성과 석성의 혼축성으로 되어 있으며, 석성은 현재 두 곳이 남아 있다. 북쪽의 것은 약 28m 길이에 높이가 3m 정도이고, 남쪽의 것은 길이 약 22m에 높이가 약 3m나 된다.
 
1989년 5월 서울대학교박물관 지표조사팀이 위례산 정상에 있는 망루 부근에서 백제시대의 첫 도읍지를 고증하기 위하여 위례산성 지표조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백제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삿무늬토기[繩蓆文土器] 조각 20여점과 마포문(麻布文)이 새겨진 기와조각[瓦片] 30여점을 비롯하여 지표 1m 밑에서 성의 기초석[城門石, 예전에는 흔히 ‘말구유’라 불렀음]과 창촉․낫으로 보이는 부식된 쇠창과 쇠낫 등의 철기류를 발굴하였다.
서울대학교 고고학조사단(단장 任孝宰 박사)의 제2차 발굴조사에서 삼족토기(三足土器)를 비롯한 토기류와 토제 및 철제 말, 개원통보(開元通寶), 관옥(管玉) 등 300여점의 유물을 발굴하자 학계에서는 백제의 초도가 충남 천안지방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목하였다.
 
위례성에는 성곽뿐 아니라 용샘‧돌무지무덤 등이 현존하고 그와 관계된 설화가 전하고 있어 위례성의 문헌자료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 용샘[龍泉]

위례성 안에는 ‘용샘’이라 불리는 돌로 쌓은 우물이 있는데, 지름이 약 2.2m 정도 되지만 오랜 동안 흙이 퇴적되어 원래의 정확한 깊이는 알 수 없다.

이 우물은 백제 초기 왕성의 식수나 군사들의 취사용수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지방 촌로들의 말씀으로는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 돌무지무덤(積石冢)

용샘에서 서북쪽으로 약 10여m 정도 내려오면 길이 5.2m, 너비 3.8m, 높이 1.1m의 장방형 돌무지무덤 즉 적석총이 나타난다.
보는 이에 따라 민간신앙의 제단 또는 서낭당[城隍堂]의 돌무지로 보거나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또 위례성 정상에서 동남쪽(북면 운용리)으로 조금 내려오다 보면 비탈진 곳에 약 25기(예전에는 수백기)의 크고작은 돌무지무덤이 공동묘지의 봉분처럼 흩어져 있는데, 이는 아마 백제를 건국한 지배계층의 무덤이거나 백제 건국 초기에 큰 싸움이 벌어져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묻어놓은 오늘날의 국립묘지와 같은 성격의 국가적 공동묘지로 보인다.

(2) 기  타

- 제원루(濟源樓)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직산현조에 “객관 동북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동명왕사당(東明王廟)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온조왕조에 “元年夏五月 立東明王廟[원년(서기전 18) 여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직산현 사묘(祠廟)의 기록에는 “직산현의 동북 3리에 세조 11년(1465) 온조왕묘를 세우고 춘추로 향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어느 기록에는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12월 26일 조정에서 관에 명하여 백제가 처음 도읍한 직산 온조왕묘에 제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이전의 선조 30년(1597) 9월 정유란 때 왜적이 묘(廟)를 불태웠다. 
이 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조 말에는 사방 5리를 일본인에게 광권을 주지 않았다.”라는 내용도 나온다.
한편, 광주 남한산성 안의 숭열전(崇烈殿,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 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李曙)의 영혼을 함께 모신 사당으로 인조 16년(1638)에 지었으며 정조 19년(1795)에 ‘숭열’이라고 사액되어 매년 음력 9월 5일 제사를 모시고 있다.

- 전씨시조 단소 및 제실 :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219에 있는 천안전씨 시조인 섭(聶)이 살던 마을의 묘단과 재실로 충남문화재자료 제2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섭은 서기전 18년경 사람으로 백제를 일으키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후에 환성군에 오르게 되었고 천안 풍세지방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 살면서 천안전씨가 되었고 한다.
현재 섭의 묘는 없고 대신 묘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제실은 묘단 앞에 있으며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제실 입구에는 시조인 전섭의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비에 새겨 무덤근처에 세우는 비)가 있으며, 묘단이 있는 일대는 노송이 숲을 이뤄 좋은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3. 지형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는 하남위례성의 자연 지리적 조건에 대하여 “북으로 한수가 띠를 두르고(北帶漢水), 동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고(東據高嶽), 남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南望沃澤),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西祖大海)”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근거할 때 위례성(산)이 있는 천안시 입장지역은 북쪽으로 입장천(한내, 漢水)과 안성천(옛 熊川)이 흘러 아산만에 유입되고, 동족으로는 서운산(瑞雲山, 547m)-위례산(慰禮山, 524m)-성거산(聖居山, 579m)-흑성산(520m) 등이 병풍처럼 둘러막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많은 못(澤)과 넓은 들[平野]이 곳곳에 있고, 서쪽으로는 서해와 접하고 있어 문헌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직산위례성이야말로 천험(天險)․지리(地利)의 형세이므로 가히 고대국가의 도읍지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라고 본다.

4. 지명으로 볼 때
  
『한국지명총람 韓國地名叢覽』 충청남도 천원군(천안시)편에 백제의 시조 온조를 비롯해 위례성과 관련된 지명이 집중되어 나오는데, 이는 다른 지방의 지명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1) 입장면
 
- 위례성 : 입장면, 북면 경계에 있는 산. 높이 524m. 흙으로 쌓은 둘레 1,690척, 높이 8척의 성이 있음.

그 안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백제 시조 온조가 그 형 비류와 함께 유리왕을 피하여 남쪽으로 와서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온조는 이곳에 각기 도읍하였는데 그에 따라온 신하가 오간‧마려 등 열 신하가 되므로 나라이름을 십제라 하였다가 비류가 미추홀의 수토가 맞지 아니하여 도읍한 지 10년만에 그 신하를 모두 데리고 위례성으로 와서 합하게 되매 지역이 좁으므로 그 14년에 한산으로 옮기어 백제가 되었다 함.
꼭대기에 돌구유(일명 문지석, 비석받침)가 남아 있음. 
 
- 구시랑이[구시랑, 九侍郞洞, 救實鄕] 도장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➀ 백제 때 시랑 아홉 사람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➁ 백제 때 구실향이 있었음.
 
- 도장골[道場谷] : 시장리에서 제일 큰 마을. 예전에 도장을 베풀고 무술을 연마하였음.
 
- 불그물[붉은 우물, 赤井] : 불그머리에 있는 우물. 물맛이 썩 좋으므로 백제 때 나라에서 쓰기 위하여 우물 둘레를 구리로 만들었다 함.
 
- 한내[漢川] : 성거면 요방리 무너미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성거면 중앙을 꿰뚫고 정촌리에서 오목천을 합하여 입장면 용정리에서 입장천으로 들어감.
 
(2) 북면

  - 구수바위 : 위례성에 있는 바위. 구유처럼 되어 있는데, 백제 온조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쓰던 것이라 함.

  - 군단이(軍丹里) : 운용리에서 가장 큰 마을. 백제 때 군사가 주둔하였다 함.

  - 부소문이고개[扶蘇嶺] : 운용리에서 입장면 양대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 백제 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 하며, 현재 서낭당이 있음.

  - 용샘[龍泉, 위례성우물] : 위례성에 잇는 우물. 백제 시조 온조왕이 밤이면 용이 되어 이 우물로 들어가서 부여 백마강에서 놀다가 날이 밝으면 도로 이 우물로 나와서 왕 노릇을 하였다 함.

  -장생이 : 군단이 서북쪽 골짜기에 잇는 마을. 백제 때 시장이 섰다고 함.

(3) 목천읍

  - 유왕골[留王洞] : 점말 북쪽에 있는 마을. 백제의 시조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봄, 여름이 되면 이곳에 와서 머무르면서 농사를 장려하였다 함.
  - 장군바다 : 동평리 앞에 있는 큰 들. 예전에 장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훈련하였다 함.
  - 군량골[軍糧谷] : 학골 너머에 잇는 골짜기. 예전에 군량을 쌓아두었다 함.
 
(4) 성거면
 
  - 천흥사터[天興寺址] : 천흥에 있는 천흥사의 터. 백제 때 세운 큰절로서 절이 저리까지 연해있었다 하는데, 오층석탑과 짐대가 남아 있음.

  - 뱀산[蛇山] : 천흥 서쪽에 있는 산.

(5) 직산읍

  - 교동[校洞, 향교골, 당곡말] : 옥골말 서쪽에 잇는 마을. 직산향교와 사직단(社稷壇)이 있었음.
(6) 성환읍

  - 지질켕이[知足鄕] : 수향리에서 가장 큰 마을. 백제 때 재상들이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면서 ‘이만하면 족하다’는 뜻으로 마을이름을 지었다 하며, 또는 eoqr제 때 지족향이 있었음.

  - 궁말{宮里] : 궁들에 있는 마을.
  
5. 지명설화로 볼 때

직산위례성, 즉 입장위례성을 뒷받침하는 여러 전설이 입장위례성 일원에 예로부터 전해오고 있다.
(1) 위례성과 용샘

   <전설1>

백제의 북쪽, 지금의 입장면 당곡리(堂谷里) 산성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연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제군은 지형을 잘 이용할 뿐만 아니라 용왕의 아들인 임금이 있었기 때문에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고구려군을 물리치곤 하였다. 이 백제 임금은 낮에는 용으로 변하여 웅진(熊津)에서 위례성 용샘까지 땅속으로 뚫린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달려와서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밤에는 용샘을 통해 다시 땅속 물줄기를 타고 웅진 왕궁으로 가서 밀린 정사를 처리하는 피곤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임금 자리를 엿보던 처남이 용왕의 아들임을 알고는 백제 임금을 제비를 미끼로 낚아채 죽여버렸다.
  
백제의 임금이 죽은 후 위례성의 백제군은 죽은 임금을 찾다 고구려군에게 전멸당했다.
그러자 여기저기 놓인 산들이 위례성을 향하여 집약되어 울었다고 한다.

[* 필자가 전해오는 내용을 요약한 것임]

   <전설2>
 
천안시 입장면 당곡리에는 백제군이 고구려군한테 패하고 울었다는 위례성이 있는데, 위례산 둘레에는 지금도 옛날을 말해주듯이 백제의 성터가 남아 있다.
  
한편, 위례산 꼭대기에는 용이 놀았다는 용샘이 있는데, 이 용샘은 공주까지 뚫렸다고도 하고 서해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서 샘 바닥이 보이고 지름이 5m 정도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샘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산마루에는 전쟁 때 백제 임금의 화살막이를 했던 3m 가량의 높은 돌이 꽂혀 있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말구유(城門石으로 봄)로 쓰였던 커다란 돌이 두쪽으로 깨진 채 있으며, 동쪽으로는 어느 장군이 시험하기 위하여 돌에 주먹모양으로 패인 바위가 있다.

어찌하였든 전쟁가 관련이 많은 이 산에 또 하나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이 전설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옛날 남침해오는 고구려군을 막기 위하여 백제왕이 이곳 위례산까지 와서 독전(督戰)하였다.
그런데 이 백제왕은 용왕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나타난 임금으로 온갖 재주를 다 지닌 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에는 용으로 화하여 공주에서 위례산 용샘까지 땅속으로 뚫린 물즐기를 타고 단숨에 달려와서 천연적으로 유리한 이곳의 지형을 이용하고 온갖 조화를 부려 전쟁을 지휘하고, 밤에는 다시 공주로 가서 낮에 하지 못한 나랏일을 돌보았다. 그리하여 백제는 날로 강한 나라로 커갔다.
그러던 중 백제 임금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그의 처남이 임금이 용이라는 것을 왕비에게서 들은 후 제비를 미끼로 용이 되어 돌아오는 임금을 낚시로 낚아 죽였다.
그 뒤 임금이 죽은 위례산 싸움에서 백제군은 패하여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 [충남의 전설(한상수 편, 대전 한일출판사, 1979)] 

(2) 유왕골[有王谷]
 
<전설1>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덕전리(德田里)에 가서 점말 북쪽을 찾으면 유왕골이란 마을이 있다.
구전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가 남하하여 위례성에 도읍을 하였을 때 봄과 여름이 되면 이 마을에 와서 머무르면서 농사를 장려하였다 해서 유왕골, 유왕동이라고 부른다.

* [天原實錄(천원군 편, 1982)]

<전설2>

점말 북쪽에 있는 마을.
백제의 시조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봄, 여름이 되면 이곳에 와서 머무르면서 농사를 장려하였다 함.
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태조산에 진을 치고 이곳에 머물렀다 함.

* [韓國地名總覽 4-충남편 하-(한글학회, 1974)]

<전설3>
 
목천의 만일령 밑에 있다.
언전에 의하면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하였을 적에 춘하로 내유(來遊)하여서 이 이름이 생겼다 한다.
삼남요로를 통망(通望)할 수 있고 위례‧흑성(黑城) 양산간에 위치하고 있다.   

* [天原郡誌-下-(天安郡誌編纂委員會, 1969)]

(3) 온조묘(溫祚廟) : 구직산 3리허에 있었다. 조선 세조 11년에 시건하여 제물이 나리더니 선조 정유재란 때 직산싸움으로 왜적이 태운 바 되며, 사례(祀禮)를 잉폐(仍廢)하였다.                            
 
* [天原郡誌-下-(天安郡誌編纂委員會, 1969)]

6. 민속으로 볼 때

(1) 호당리(당골) 동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용샘 밑 위례산자락에 자리한 입장면 호당리 당골[堂谷]에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동제(洞祭)와 가뭄이 심하게 들면 용샘 아래에서 기우제도 지냈다.
매년 정초에 산신께 제를 올리는데, 재차(祭次)는 다른 지방의 것과 비슷하다.

동제의 한글 축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유세차 ○○ ○월 ○○삭 ○일 ○○ 유학 ○○○
     감소고우
     산지령왈
     온조구국 용천수석 복축우좌 세치풍량
     례성유허 호견촌여 로소감안 사무간란
     소제질위 백상감화 유신소우 제성보세
     구수재해 일촌형태 기다차대 근구브의
     신기래격 길일양진
     상향”
 
또 이 용샘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샘의 바닥 끝이 공주 금강(또는 서해)까지 뚫렸으며, 명주실 여러 꾸리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 온조왕이 밤이면 이 우물을 통하여 금강으로 가서 놀다가 날이 밝으면 도로 이 우물로 나와서 용상에 앉아 정사를 돌보았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한다.

7. 성씨 및 족보로 볼 때
   
백제 건국공신인 10신 중 대부분이 위례성 주변의 지명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조의 사당도 현존하고 있다.
 
(1) 직산조씨(稷山趙氏)

직산조씨는 백제의 개국공신인 조성(趙成)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직산조씨갑자대동보 稷山趙氏甲子大同譜』에 의하면
“시조 성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 제11대 황제, 재위기간 : 서기전 32~7) 때 주몽(朱蒙, 東明聖王)의 셋째 아들 온조를 도와 위례성에서 백제를 건국하고, 한산(漢山)으로 천도하여 마한을 멸망시킨 후 백제창업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훈공을 세워 경양군(慶陽君)에 봉 해졌다.
뒤에 다시 예성부원군(醴城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가 하남백(河南白)에 이봉(移   封)되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준연(俊連)과 손자(孫子) 입충(立沖)이 함께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을 역임한 것으로 전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하남이 직산의 옛이름이기 때문에 직산(稷山)을 본관  으로 삼았다.
직산조씨는 2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성씨로서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오래된 씨족의 하나이다.”
라고 한다.

(2) 천안전씨(天安全氏)

시조 섭(聶)은 온조왕이 백제를 개국할 때 오간․마려․을음(乙音)․해루(解婁)․흘간(屹干)․곽충(郭忠)․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공을 세우고 십제공신으로 환성군(歡城君, 환성은 천안의 별호)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천안으로 하고 16세손 낙을 중시조로 한다.
 
천안시 풍세면 삼대리에 단(壇)을 만들고 음력 10월 1일 향사하고 있다.

(3) 목천마씨(木川馬氏)

마씨는 삼한시대 부족국가에서 발원된 우리나라 토착성씨로서 마한의 첫 군주인 겸(謙)이 비조(鼻祖)로 알려져 왔으며, 『마씨대동보』에는 백제 건국공신으로 좌보(左補)의 벼슬을 역임한 려(黎)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시조 려는 온조왕의 보좌관으로서 오간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온조왕을 따라 고구려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위례성에 도착해 십제국(후에 백제로 개칭)을 세워 온조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한편 그의 형 신(信)은 고구려에 남아서 동명왕을 보필하였으니 형제가 모두 임금을 모신 사람들이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여러 대에 걸쳐 계통을 밝혀놓은 기록이 전하지 않아 이후의 후손은 알 수 없어 중단되었다가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한 뒤에 복구를 도모했던 육황(陸況, 또는 陸沉-육침)을 중시조로 다시 계통을 찾았고, 그 뒤 그의 8대손인 순흥(順興)이 고려 정종 때 문하시중 평장사에 오르고 목천군(木川君)에 봉해지면서 목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8. 어문학으로 볼 때

(1) 어  원

‘위례’의 어원에 관해서는 ‘우리’, 즉 담장에서 기원했다는 견해가 있다.
또는 백제왕에 대한 호칭인 ‘어라하’에서 비롯된 ‘왕성(王)’․‘대성(大)’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여 위례성은 ‘대성(大城)’을 가리킨다고 한다.
또한 ‘위례’란 명칭이 성책에 특징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조선 후기의 학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즉 ‘위례’란 방언에 광곽(匡郭)의 사방을 둘러친 것을 ‘위리(圍謙)’라고 하는데, ‘위례’와 ‘위리’는 그 말소리가 비슷하며, 또 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축토하여 광곽(匡郭)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위례’라고 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 『서울 600년사』
 
그러나 저자는 「백제 위례성 연구-지명과 설화를 중심으로-」에서 ‘위례’를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왕력조에 일설로 나오는 비류의 아버지 우대(優台)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국도의 이름으로 삼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았다. 그랬더니 ‘우대’는 ‘우데’→‘우레’로 변하였다고 보았다.
‘우데’의 원시어를 ‘욷’으로 재구해 보았다.

그리하여 ‘우대’의 원시어를 ‘욷’으로 재구해볼 때 ‘욷’은 현대어의 ‘웃/위’로서 ‘높다[上/高]’, 또는 ‘처음 시작하다[開始], 새롭다[新]’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위례성은 ‘나라를 처음 열고 윗사람이 거하시도록 높은 곳에 세운 왕성(王城)’을 뜻한다고 해석하였다.

(2) 제원루시(濟源樓詩)

- 서거정(徐居正) : 직산을 지나다 제원루에 올라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시를 지었다.

     百濟遺墟草自平 我來感慨一傷情(백제유허초자평 아래감개일상정)
     백제의 옛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는데,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했네.
     五龍爭罷天安府 雙鳳鳴殘慰禮城(오룡쟁파천안부 쌍봉명잔위례성)
     다섯 용이 천안부에서 싸워 파하고, 봉황 한쌍이 위례성에서 우네
     始祖祠深紅樹合 聖居山擁碧雲橫(시조사심홍수합 성거산옹벽운횡)
     시조의 사당은 깊은데 단풍나무에 가렸고, 성거산이 옹위하는데 푸른 구름 비꼈어라.
     登樓多少秋風思何處吹殘鐵笛聲(등루다소추풍사 하처취잔철적성)
     누각에 올라 가을바람에 나는 생각, 어디서 쇠피리소리만 들려오는가
 
- 이찬(李粢)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 김홍욱(金弘郁, 선조 35~효종 5) : 호는 학주(鶴洲)

<稷山慰禮城懷古 직산위례성회고>

     何年百濟此經營(하년백제차경영)  어느 세월 백제는 이곳을 경영했던가      
     惟見丘墟草木平(유견구허초목평)  황폐한 옛터엔 초목만 무성할 뿐이네      
     千古興亡天已老(천고흥망천이로)  천년 세월 흥망은 이미 오래전의 일..      
     三分形勢月空明(삼분형세월공명)  옛 삼국의 형세 저 달같이 헛된 빛일세      
     河流曲抱蛇山郡(하류곡포사산군)  강물은 이곳 사산을 감싸 돌아 흐르고      
     野色橫蟠慰禮城(야색횡반위례성)  거친들 위례성을 가로질러 서렸도다      
     欲弔英靈無可問(욕조영령무가문)  옛 넋들을 기리고저 해도 물을길 없고      
     劒歌嗚咽獨傷情(검가오열독상정)  느껴 우는 검가소리에 홀로 슬퍼지누나…        *
     * 蛇山 : 직산(稷山)의 옛이름. 검가 : 무악(武樂), 금속(鐘)의 악기

9. 천도과정으로 볼 때
 
백제의 뿌리가 졸본부여와 고구려에 있으므로 백제가 북쪽을 지향하는 북진정책을 도모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국력이 강성해질수록 북으로 올라가 도읍을 정하였고 세력이 약화되매 부득이 남으로 내려와 도읍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대방고지를 건너온 온조를 비롯한 10신은 온조왕 원년(서기전 18) 충남 천안 입장의 위례성에 자리 잡고 나라를 세운 다음 온조 14년(서기전 5) 경기도 광주의 한산으로, 다시 근초고왕 26년(서기 371)양주의 북한산(서울)으로 북천했다가, 개로왕 21년(서기 475) 충남 공주의 웅진(熊津)과 성왕 16년(서기 538) 부여의 사비(泗沘, 所夫里)로 남천하고 31대 의자왕 20년(서기 661) 나당연합군에게 함락 당했다.

(1) 위례성(하남위례성, 직산=입장) : 온조왕 원년(서기전 18)
  
* 13년 봄 2월 왕도에서 할멈이 사내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안에 들어오고(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왕모가 돌아가는(王母薨) 등 흉사가 겹쳐 일어남. 8월 마한 왕에게 천도할 것을 알림.

(2) 한산(광주) : 온조왕 14년(서기전 5) 봄 정월 도읍을 옮김
 
(3) 북한산(양주) : 제13대 근초고왕 평양을 탈취, 동왕 26년(서기 371) 겨울 평양성 공격,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활에 맞아 죽음. 도읍을 한산(북한산)에 옮김 
  
(4) 웅진(공주) : 21대 개로왕 21년(서기 475) 9월 고구려 왕 연이 한성을 포위해 피살당하자 제22대 문주왕 원년(서기 475) 겨울 10월 도읍을 웅진으로 옮김
       
(5) 사비(泗沘, 所夫里, 부여) : 제26대 성왕 16년(서기 538) 봄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이상의 논증을 종합해 볼 때 백제의 초도읍지 위례성은 충남 천안시 입장면 위례산성과 그 일원으로 볼 수밖에 없다.
 
 

<안성남사당패의 근거지 '서운산 청룡사(瑞雲山 靑龍寺)'>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28번지 서운산(瑞雲山, 547m) 자락에 있는 청룡사(靑龍寺)는 1265년(고려 원종 6)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했다.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 나옹왕사(懶翁王師)가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서기가 가득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호),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문화재자료 59호) 등이 보존되어 있다.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된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 윗몸에 연꽃과 연꽃봉오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놓아 장식이 많이 섞인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기둥은 아름드리 원목을 껍질만 벗긴 채 원목의 나무결 그대로 구불구불한 모양을 살려 세운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게 꾸몄고, 지붕 한가운데 청기와가 하나 남아 있다.

대웅전 안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시도유형문화재 170호)을 비롯해 1674년(조선 현종 15)에 밀언(密彦)에 의해 주조된 5톤 무게의 동종(보물 11-4호)과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 보물 1257호)․감로탱(甘露幀, 보물 1302호), 그리고 대웅전 앞에는 괘불을 걸었던 돌 지주가 있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기도 했던 청룡사는 여느 사찰과 다른 청룡사만의 특징이 있는데, 이는 남사당패의 근거지로서 바우덕이패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찰들은 재정형편이 어려웠는데, 청룡사는 사당패를 보호하는 구실을 하고 남사당패는 공연을 해서 먹을거리와 현금을 대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 공생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바우덕이패는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누비다가 겨울에는 월동을 하며 기예공부를 익혔다. 청룡사 사적비(시도유형문화재 124호)에서 부도군을 지나 올라가면 남사당의 근거지인 불당골이 나온다.

불당골은 사당패의 근거지여서 사당골이라고도 했는데, 황석영(黃晳暎)의 대하소설 <장길산 張吉山>과 김윤배의 장시 <사당 바우덕이>는 이곳에 터를 잡았던 사당패를 소재로 삼아 쓴 작품이다.
 
요즈음은 진천․천안․평택 등에서 휴식을 즐기러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주변에 청룡저수지, 바우덕이묘, 은적암, 서운암(일명 토굴절), 서운산성지, 석남사(石南寺), 이덕남(李德南)장군묘를 비롯해 좀 멀게는 죽주산성(竹州山城), 칠장사(七長寺), 미리내성지 등의 볼거리가 있어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바우덕이>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바우덕이(金岩德, 1848∼1870)는 조선시대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로 안성남사당의 전설적인 인물로 전한다.
 
남사당이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단체로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라 할 수 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40∼50여명으로 조직되었고 이 단체를 이끌어 나간 대표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으로 직책을 나누었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계획을 수립하여 기량을 연마하였고 전국 장터를 다니면서 풍물놀이는 물론이고 줄타기‧탈놀이‧창(노래)‧인형극‧곡예(서커스)를 공연하였다.
 
조선말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5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불당골 안성남사당에 맡겨져 염불․풍물․소고춤․줄타기․무동․새미 등 온갖 기예를 익히게 된다.
1863년 15세 때 안성남사당패를 이끌던 윤치덕이 죽자 남사당패의 관례를 깨고 어린 여자의 몸으로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추대된다.
타고난 천부적 재능과 미색을 겸비한 총기로 남사당패의 꼭두쇠로 추앙받았고, 여성 꼭두쇠라는 특성과 탁월한 기예로 안성남사당패를 최고의 인기 예인집단으로 발전시켰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에 옹골찬 소리가락, 바람에 휘날리는 줄타기 재주가 최고의 경지에 달해 가슴을 앓은 남정네가 많았다고 한다.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 현장에 안성에 거주하던 이승지의 후원으로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 뛰어난 기예를 선보여 사기가 떨어진 많은 공역자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엄청난 규모의 경복궁 중건사업은 잘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아마 바우덕이가 없었다면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바우덕이가 공연을 할 때는 얼마나 신명이 났던지 공역자들은 등짐에 짐도 지지않고 분주히 뛰어다니며 “얼수 얼쑤” 흥을 어우르기만 했다는 일화로 미루어볼 때 당시의 감흥과 신명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러한 공로로 대원군은 일개 천민에게 파격적인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리고 영기에 옥관자를 걸어주었다.

이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남사당패는 ‘바우덕이’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그녀가 이끄는 안성남사당패가 지나가면 다른 사당패는 깃발을 숙이며 예의를 표하는 ‘기배(旗拜)’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1870년,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폐병으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자, 마지막에 그를 돌보던 이경화가 고인의 뜻에 따라 청룡골 입구 개울가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고 한다.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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