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대장부가 일생에 태어나서 해볼 만한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들었다. 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 교만인우(交萬人友)가 그것이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여행해보고, 만 명의 친구를 사귀어보고 죽으면 한 세상 태어난 것이 그리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 가지 대장부 필생사업(?) 가운데 제일 구미가 당기는 것은 ‘행만리로’였다. ‘소국(小國)의 왕 노릇을 하기보다는 대륙을 떠도는 한 조각의 구름이 되는 것’이 더 남는 장사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20대 중반부터 천하를 여행하였다. 말 그대로 주유천하(周遊天下)였다. 주유천하를 하다보니까 학자도 만나게 되고, 풍물을 구경하게 되고, 아름다운 경관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보고, 기인, 달사들을 만나 같이 뒹굴면서 영발(靈發)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이러한 만남과 구경의 과정이 나의 인생 대학이었다. 교과서는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길바닥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용헌의 주유천하’에서는 그 길바닥의 경험과 철학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가 전라도 구례에 있는, 류씨들의 고택인 운조루(雲鳥樓)에 대한 이야기이다.
운조루라는 고택이 왜 중요한가? 6·25라는 참혹한 전란에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집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꼽는다면 나는 두 가지를 꼽는다. 임진왜란과 6·25이다.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6·25는 그 사망자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전쟁이었다. 어떻게 보면 임진왜란보다 더 참혹한 전쟁이 6·25이다. 우리 역사에서 짧은 기간에 3백만 명 이상이 사망한 전쟁은 6·25밖에 없다. 6·25의 특징은 외적과의 전쟁이 아니다. 같은 말을 쓰는 동족 간의 전쟁이고, 동족 중에서도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전쟁이었다. 거시적으로 보면 조선조 5백 년 동안 양반에게 억눌려 살았던 상놈의 한이 폭발한 전쟁이다.
그러다보니 전쟁의 핵심 타깃은 ‘양반부자’였다. 그 양반부자는 이북보다 이남에 많이 살았다. 조선시대에 이북은 천대를 받았던 지역이었다. 이남에서는 충청도의 양반 집안들이 피해가 심했고, 전라도의 부자 집안들이 또한 피해가 심했다. 경상도는 낙동강 이남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이남에서 6·25를 전후하여 가장 피해가 특히 심했던 지역은 지리산 문화권이다. 지리산은 한국 빨치산의 메카이다. 해방 이전부터 자발적인 빨치산들이 숨어 있던 지역이므로 이 일대의 부자와 양반들은 목숨과 재산을 온전히 지키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그런데 류씨 집안의 운조루는 이 지리산 문화권을 대표하는 양반부잣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6·25 때에 피해가 없었다. 죽은 사람도 없고, 대저택이 불타지도 않고, 특별히 좌익들에게 고생을 당한 일도 없었다. 이 점이 대단한 것이다. 다른 부잣집들은 집이 불타고 그 집안사람들이 총을 맞거나 대창에 찔려 죽었다. 사실 난리가 나면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평소에 쌓여있던 개인감정이 문제다. 난리가 나면 그 기간은 평소에 쌓여있던 개인감정 정리하는 기간이 된다. 6·25가 특히 그랬다고 본다.

아흔아홉 칸 집이라 불렸던 운조루는 대저택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좌우로 행랑채가 연달아 있었다. 행랑채는 총 열여덟 칸이었다. 열여덟 칸이면 약 30명 정도의 손님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행랑채가 이렇게 큰 것은 드나드는 과객과 손님이 많았음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 쌀뒤주는 집주인이 외부인이 와서 가져갈 수 있도록 개방한 뒤주였던 것이다. 주변의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쌀을 퍼갈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이 집의 재산은 약 3천 석에 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처음 ‘타인능해’ 쌀뒤주를 놓았을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마구 쌀을 퍼갔다고 한다. 심지어는 한 사람이 한 말씩 퍼가기도 하였다. 공짜니까 체면도 염치도 없이 가져갔던 셈이다. 그러다가 차츰 그 양이 줄었다. 쌀뒤주가 비면 주인이 다시 채워 놓으니까, 언제라도 오면 쌀을 가져갈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두세 끼 정도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양만 가져갔다고 한다. 사실 쌀뒤주의 마개를 열고 쌀을 가져가려면 한두 되 정도의 양이 적당하다.
구례와 하동 일대를 여행하는 과객들도 이 집에 들러서 며칠씩 신세를 졌고, 떠날 때는 여행식량용으로 이 쌀뒤주에서 몇 되씩 쌀을 가져가곤 하였다. 집주인은 보통 열흘에 한 번씩 쌀뒤주를 채워놓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 달이면 평균 일곱 가마 반의 쌀이 주변의 어려운 사람, 또는 과객들에게 제공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일 년이면 어림잡아 백 가마 가까운 양이다.
이 집 어른은 월말이 되면 며느리에게 항상 쌀뒤주에 쌀이 남아 있는지 확인시켰다고 전해진다. 만약 쌀이 많이 남아 있으면 한탄을 하였다. “우리 집안이 덕을 베풀어야 하는데, 쌀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덕을 베풀지 못했다는 것 아니냐? 그러니 쌀이 쌓여서 남아 있지 않도록 하여라!” 자기 재산 귀한 줄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이 재산을 푼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지리산 일대가 5백 리이다. 한국의 실크로드라고 할 만한 길이 바로 지리산을 둘러싸는 길이다. 영호남이 교류했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따라 운조루의 덕망이 퍼지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마치 경주 최부잣집의 명성이 이북에까지 퍼졌듯이 시간이 흐르면서 운조루의 이름도 전국에 퍼져나갔다.
이 명성이 6·25라는 참혹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운조루 집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였다. 아무리 빨치산이라도 지리산권에서 최고로 덕망 높은 집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6·25 이전에 발생한 여순반란 사건 때 반란군 주모자인 김지회가 군경의 추적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때 운조루 뒷길로 올라갔는데, 김지회 일당도 운조루를 불태우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러나 그 일당은 주변의 다른 지주 집안사람들은 죽였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운조루를 건들면 안 된다는 것이 지배적인 여론이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이든지 법 위에 여론이 있다. 여론이야말로 최후의 법이다. 이 일대에서 운조루 집안의 쌀을 안 가져다 먹은 집이 어디 있는가. 그런 집을 부자양반이라고 해서 어떻게 불태운단 말인가. 사람 사는 동네의 ‘인지상정’이란 이런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조선시대의 노비제도는 공식적으로는 끝났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주인집에 복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운조루에서는 1944년에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양민으로 살도록 방면한 것이다. 이는 주인의 대단한 결단이었다. 방면하지 않아도 되는데 주인의 결단으로 재산상의 손실을 감수했으니까 말이다. 일생 동안 노예로 살다가 자유를 얻은 이 노비들이 운조루 집안에 대한 고마움을 깊이 간직하였다.
6·25가 발생하자 이 노비 집안의 일부 젊은 사람들은 좌익에 가담했고, 지주와 부자들을 징벌하는 데에 앞장도 섰다. 하지만 운조루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혹시라도 운조루에 대한 해를 입히려는 기미가 있으면, 방면된 노비 집안의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운조루를 변호하였다. “그 집은 절대로 손을 대면 안 된다.”

뒷산은 노고단이요, 앞의 강은 섬진강이다. 그리고 노고단과 섬진강 사이에는 넓은 들판이 자리 잡고 있다. 백두대간에서 내려온 맥이 마지막으로 뭉친 곳이 지리산이고 노고단이다. 여기에서는 온갖 산나물이 다 나온다. 땔감도 나온다. 섬진강에서는 온갖 물고기가 잡힌다. 들판에서는 곡식이 풍요롭다. 부족한 것이 없다. 그래서 운조루가 명당으로 꼽혔던 것이다.

조안에서 부귀가 나온다. 터를 잡을 때 나는 조안을 먼저 보는 습관이 있다. 운조루의 안산은 오봉산(五峰山)이다. 다섯 개의 둥그런 봉우리가 포진해 있다.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오봉산이 그렇게 좋은 봉우리라고 한다. 둥그런 봉우리들이므로 돈을 상징하기도 한다. 풍수가에서는 터 앞에 둥그런 봉우리들이 보이면 재물이 쌓인다고 믿는다. 둥그런 봉우리는 나락을 쌓아놓은 노적봉에 비유된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 생가가 있는 경남 의령군 정곡면의 주변 산세도 이처럼 둥그런 봉우리들이 많다. 부자 터는 둥그런 봉우리가 많다. 오봉산 뒤에는 높은 산봉우리들이 포진해 있다. 조산에 해당하는 백운산 자락이다.
전체적으로는 불꽃 같은 형상이다. 그 중간에 삼각형 모양의 봉우리도 보인다. 이 삼각형 봉우리가 문필봉이다. 문필봉이 있어야 학자가 나오고 과거에 급제하는 인물이 나온다. 돈만 있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집안에 학자가 나와야 그 집안이 오래간다. 그러려면 문필봉이 있어야 한다. 문필봉은 과거급제를 최고의 가치로 쳤던 조선시대 양반 집안에서 가장 선호하던 산봉우리이다. 1776년에 이 집터를 처음 잡을 때에도 중요하게 고려했던 풍수 요건이 아마도 이 문필봉의 존재였을 것이다.
한옥의 강점은 지진에 강한 것이고, 약점은 화재에 약한 것이다. 그렇기에 물이 필요하다. 중국의 사찰들을 가보면 대웅전 앞에 인공으로 조성한 큰 연못이 있다. 바로 화재진압용으로 만든 것이다. 집 앞의 연못은 앞산의 불기운을 차단하는 역할도 하지만, 집 뒤에서 내려오는 지기(地氣)가 앞으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물이 있으면 지기는 멈춘다. 운조루의 앞에 파 놓은 연지(蓮池)는 그 용도가 다양한 것이었다.
이 내당수는 동출서류(東出西流)이다. 외당수인 섬진강 물의 흐름과 반대이다. 그 흐름이 반대라서 좋다. 물 기운이 양쪽에서 집을 에워싸는 것이다. 수기가 집을 에워싸야만 집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이 가라앉고 건강에 좋다. 운조루의 종손인 류홍수 씨에 의하면 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이 내당수에서 참게도 잡고 붕어도 잡았다고 한다. 그만큼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하다. 저녁에 이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다. 물소리를 많이 들으면 머리가 시원해지고, 아울러 걱정이 사라진다. 90년대 초반에 시멘트로 이 수로를 포장하면서 참게는 사라졌다. 그러나 물소리는 아직도 남아 있다. 집 앞에 이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집이 어디에 있겠는가.
운조루가 지닌 풍류는 바로 전망이다. 그만큼 전망이 좋은 집이다.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집을 지을 때 약간 높게 지었다. 그래서 루(樓)를 집 안에 3개나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머무르는 루, 아버지가 머무르는 루, 그리고 여자들이 즐길 수 있도록 안채에도 루를 만들었다. 특히 안채의 루는 2층 다락방의 높이이다. 여기에서 보면 운조루 앞 수십만 평의 들판이 모두 보인다. 들판 너머로는 섬진강이 은빛을 발하면서 흘러가는 모습도 보인다. 섬진강 너머로는 장엄한 백운산이 우뚝 서 있다. 이 모든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건축구조를 지녔다. 이름이 운조루인 것은 그만큼 전망이 좋은 집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뭘 모르는 사람이 볼 때 종손의 행색도 초라한 운조루는 퇴락한 고택에 불과하다. 외관상으로는 특별한 집이 아니다. 그러나 따지고 들어가면 운조루는 조선의 부자양반의 철학을 뼛속 깊이 실천하고 살았던 집이다. 그 때문에 처참했던 6·25의 참화를 겪고도 오늘까지 건재한 것이다. 겉옷은 허름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속살을 간직하고 있는 집이 운조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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