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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곡성 낙죽장도 전통의 맥 잇는다 1.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한병문 장도장

문근영 2010. 7. 19. 07:30

곡성 낙죽장도 전통의 맥 잇는다 1.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한병문 장도장
입력시간 : 2009. 10.28. 00:00


어릴적 한문 배우다 장도 제작기술 습득

7 마디 대나무에 매화·난·국화 등 형상화

전국 유일한 전남 문화재 보존 활동

옛 선조들이 호신이나 충절도로 허리춤과 주머니에 차고 다녔던 칼, 낙죽장도(烙竹粧刀).

대나무에 불에 달군 인두로 한시를 쓰거나 사군자(매난국죽)을 새겨넣어 정절을 중시하던 선비들이 즐겨 사용한 애호 물품이었다.

일반 장도가 언제부터 사용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낙죽장도는 한시와 매화·난초·국화·대나무 등 사군자를 낙죽하기 때문에 선비와 문인들의 전통 사상을 중시하고 의리 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장도보다 그 가치가 높다.

낙죽장도는 인두가 식기 전에 온도에 맞춰 한땀한땀 무늬를 곱게 새겨 넣어 무엇보다 낙죽장도를 새기는 낙죽장의 경험을 요구하는 세밀한 공예다.

지난 93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활동'

낙죽으로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한병문(77) 장도장.

한 장도장은 낙죽금장도장으로 지난 199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도 한 장도장은 지난 1991년 10월 제16회 전승 공예대전에서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한데 이어 같은해 11월 열린 제19회 동아공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낙죽장도를 알리는데 공헌해 왔다.

한 장도장은 13세 무렵 재종조 할아버지(할아버지의 사촌 동생)로부터 한문공부를 배우다 어깨너머로 장도 제작을 지켜보다 장도기술을 배우게 됐다.

21세까지 기술 전수를 받다가 할아버지의 작고로 '홀로서기'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이것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6·25 전쟁 등으로 전국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공예인 낙죽의 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

이후 농사를 지으며 가계를 이어가던 한 장도장은 지인에게서 일본 한 박물관에 전시된 낙죽장도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자신에 장도기술을 가르쳐 준 재종조 할아버지의 낙죽장도가 일본으로 넘어가 이름도 없이 전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한 장도장은 낙죽장도의 맥을 유지하기 위해 손을 놓았던 인두를 다시 집어들었다. 30여년 만이었다.

하지만 대를 이어온 낙죽장도의 공예기술이 문화재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낙죽장도에 대한 관련 문헌과 기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주위에서는 한 장도장의 낙죽장도를 전통을 가미한 개인 창작물 정도로 치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낙죽장도의 기록은 서울 인사동에서 찾을 수 있었다. 1974년 9월 창간된 '통일미술'이라는 장도편 미술공예지에 자신의 스승인 재종조 할아버지의 낙죽장도에 대한 기록이 나왔던 것이다.

이후 한 장도장의 문화재 지정 작업은 빨라졌다. 전국 유일하게 전남지역에서만 존재하는 낙죽장도의 문화재 가치가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7마디 흠집없는 대나무가 관건

낙죽이 물건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중국에서부터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드문 기술이었지만 조선 순조(재위 1800∼1834)때 박창규에 의해 일제시대까지 전승해 내려오고 있다.

낙죽은 온도를 맞추어 그려야 하고 인두가 식기 전에 한 무늬나 글씨를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에 작업 경험과 속력이 필요하다.

낙죽은 접는 부채의 맨 처음과 마지막에 쓰이는 두꺼운 대나무(합죽선)살에 가장 많이 쓰인다.

칼을 만드는 시간은 보통 10여일이 걸린다. 칼집을 만드는 대나무와 소뼈, 소뿔, 먹감나무, 부래풀 등 10여가지에 달하는 재료를 구하는 시간은 1년이 족히 걸린다.

특히 낙죽장도의 주재료인 대나무는 굵기가 가늘고 마디가 7마디 이상으로 흠집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재료 선정에 더욱 심혈을 기울인다.

다른 재료들은 인근 시장 등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지만 낙죽장도에 사용될 대나무는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재료가 다 구해지면 한 장도장은 제작 3일전 목욕재개하고 혼자 작업과정에 들어간다. 작업이 시작되면 정신을 집중하고 온 몸의 기를 한데 모아 제작하기 때문에 칼이 완성되기까지는 거의 탈진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낙죽장도는 15㎝내외에 7마디 이상의 대나무에 인두로 지져서 깨알같은 글을 옮겨 곱게 새겨 넣는다. 7마디 이상의 대나무를 고집하는데는 '7'이라는 숫자가 행운의 숫자이면서 낙죽장도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낙죽장도에는 한시를 쓰거나 사군자(매란국죽)를 새겨넣는다. 구름과 산수, 다람쥐, 왕새우, 포도넝클 등을 그려 넣기도 한다.

낙죽장도 자체에도 사군자의 의미가 깃들여 있다. 칼집인 대나무 자체는 죽(竹)이고 칼집 위에는 낙죽으로 매화(梅)가 그려진다. 또 칼집 장식에 소가죽으로 푸른 잎의 난이 물들여지고, 국화모양의 칠보로 칼의 장식이 마무리된다.

낙죽장도는 분죽캐기 → 칼집과 칼자루제작 → 칼몸제작 → 금상감 → 낙죽공정 → 칼끈제작 → 열처리 등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또 칼몸에 순금으로 금상감을 하는데 별은 행운의 상징으로 북두칠성을, 문자는 일편심(一片心)이라는 글자를 많이 쓴다.

그가 제작한 낙죽장도는 현재 일편도와 경인도, 칠성죽장검, 칠성죽장도, 낙주칠성좌장검, 낙죽금장도, 죽패도, 죽장창, 횟대검, 창포검 등이 있다.

그는 "낙죽장도를 만드는데 필요한 낙죽의 기술은 속도와 힘 조절에 있다"며 "모든 게 수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어렵지만 그만큼 소장가치가 높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 전수 지원금 턱없이 부족

지난 93년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한 장도장은 낙죽장도의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한계가 더 많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전수 지원금은 월 130만원으로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문화재 지정이 개인에 한정돼 아들과 손자 등에 전수조교로 공예기술을 전수하더라도 무형문화재로서 맥은 끊어질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같은 사정 때문에 한 장도장은 몸이 건강해 낙죽장도 하나라도 더 제작해 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낙죽장도를 제작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다"며 "특히 최근 건강이 악화돼 낙죽장도를 더 많이 제작하고 싶어도 제작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최근 낙죽장도에 대한 전통과 얼을 알리기 위한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조만간 자신의 문화재 전수관에서 낙죽장도 전시와 함께 낙죽장도 제작 체험장을 함께 운영할 계획이다.

그는 "전남지역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낙죽장도가 지역민을 넘어 전국민들에 인식될 수 있도록 전시회를 갖는 등 다양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며 "한국의 전통문화와 얼을 간직하고 있는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낙죽장도 한병문 장도장이 낙죽장도의 주재료인 대나무를 손질하고 있다.


김옥경기자         김옥경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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