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국보순례] [67] 장흥 보림사
우리는 신라의 역사를 보통 고신라와 통일신라로 시대구분한다. 그러나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 본기(本紀)의 찬술을 마치면서 "신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상대(上代), 중대(中代), 하대(下代)로 구분하였다"고 증언했다. 상대는 우리가 고신라라고 부르는 700여년간이고 통일신라는 선덕왕(780~784) 이전을 중대, 이후를 하대신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대와 하대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너무도 달랐다. 김양상이 혜공왕을 죽이고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하대신라에는 걷잡을 수 없는 쿠데타의 악순환이 일어나 150년간 왕이 20명이나 교체되었다. 이런 정치적 혼란으로 경주의 왕실 귀족문화는 급속히 퇴락의 길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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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바로 이 시점에서 하대신라의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킨 것은 지방의 호족세력과 이들의 지원을 받은 선종(禪宗)사찰들이었다. 그 첫 번째 가람이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이다. 중대신라의 상징이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면 하대신라의 상징은 장흥 보림사 가지산문(迦智山門)이다.
보림사 이후 전국 각지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유학승과 고승들이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남원 실상사, 보령 성주사, 문경 봉암사 등 후대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부르는 선종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구산선문에는 거의 다 개산조(開山祖)의 승탑과 비가 세워졌다. 하대신라는 승탑의 세기였다. 그중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은 보림사의 '보조선사(普照禪師) 창성탑(彰聖塔)'(보물157호)이다.
하대신라는 철불의 세기이기도 하다. 보림사에는 헌안왕 2년(858)에 봉안한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117호)이 있다. 이 철불은 중대신라 경주의 불상과는 전혀 다른 현세적이고 개성적인 얼굴에 강한 육체미를 과시한다. 중대신라 불상들의 이상적인 인간상 모습이 여기에 와서는 호족의 자화상 같은 파워풀한 이미지로 바뀌었다. 이처럼 장흥 보림사는 하대신라의 문화적 역동성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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