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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생명과학과 연암의 `공부법` / 고미숙

문근영 2010. 7. 5. 07:17

제49호 (2007.6.20)


생명과학과 연암의 ‘공부법’

  

고 미 숙(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생명이란 무엇인가?>, <시냅스와 자아>, <브레인 스토리>, <꿈꾸는 기계의 진화> - 최근 내가 공부하고 있는 생명과학에 관한 책들이다. 워낙 쉽고 간결하게 쓰인 탓에, 나 같은 ‘초짜’도 35억년에 이르는 ‘무량겁’의 시간을 배경으로 유전자나 뉴런 같은 초극미의 세계와 빅뱅과 은하계 같은 초극한의 세계가 ‘오버랩되는’ 진경을 맛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생명의 비밀, 뇌의 신비를 파헤치는 무대에 데카르트, 스피노자, 비트켄슈타인 같은 서구지성사의 스타들이 종횡으로 출현하는 박람강기란! 특히 놀라운 건 문체다. 무슨 과학자들이 이렇게 글을 잘 쓰는지, 하나같이 시보다 더 아름답고,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그렇게 박진감 넘치는 문체에 이끌리다 보면, 문득 정신과 육체, 주관과 객관, 마음과 우주 등의 이분법에 기초한 근대적 패러다임의 해체를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근대적 분과학의 경계를 넘어선 ‘진리의 순례자’


그래서인가. 내게는 아주 종종 이 자연과학의 담론적 지평 위로 ‘격물치지’와 ‘심즉리’, ‘일체유심조’와 같은 테제들이 고스란히 포개지곤 한다. 붓다와 공자 이래 동양학을 지배한 사유구조가 첨단 과학의 담론으로 회귀하고 있다고나 할까. 혹은 아주 오래된 과거와 첨단의 미래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다시금 도래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이 과학자들이야말로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탄생이 서로 ‘통(通)’하는 길을 찾는 구도자라 할 만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미 과학이라는 근대적 분과학의 경계를 넘어선 ‘진리의 순례자’들인바, 그들의 문체가 그토록 아름답고 강한 건 바로 그 때문이리라.    

  

연암의 공부법을 새삼 환기하게 된 것도 이 대목에서다. 누구나 인정하듯, <열하일기>가 지닌 담론적 층위와 수사적 변주는 실로 다채롭다. 중원의 천지를 향해 던지는 화려한 은유의 그물망에다 수레와 벽돌, 똥부스러기와 기와조각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문명적 혜안,  왕조의 흥망성쇠와 천도(天道)를 논하는 고담준론과 이국적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인정물태에 이르기까지. 과연 이런 깊이와 넓이가 연암의 천재성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이런 지식의 향연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앎이 곧 삶이 되고, 삶이 곧 글이 되는 구도적 열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일야구도하기>에서 보듯,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에 그가 보여준 내적 평정이 그 뚜렷한 증거다. 그가 그 순간 깨달은 ‘명심(冥心)’ 혹은 도(道)란 앎과 몸 사이의 완벽한 일치, 그것에 다름 아니다. 

  

앎이 곧 삶이 되고, 삶이 곧 글이 되는 구도적 열정


하지만, 근대적 지식은 이런 식의 배치에 대해서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연암의 저술과 <열하일기>의 담론 가운데, 오직 사회를 비판하고 문명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른바 ‘이용후생적’ 측면만을 ‘절단, 채취’하였다. 또 그것은 근대국민국가 담론 하에서 졸지에 부국강병의 논리로 전환되었고, 그때 이후 지식은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 기술문명은 더할 나위 없이 비대해졌건만, 그에 비례하여 지식과 삶의 격절과 소외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어떤 지식인도 자신을 구도자라 여기지 않는다. 아니, 지식이 ‘생에 대한 원대한 비전’과 ‘구도적 지혜’로 이어진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지식인의 죽음 혹은 대학의 붕괴는 그것이 가져온 필연적 귀결이다. 자승자박! 단언컨대, 이런 식의 소외와 단절이 심화되는 한, 지식의 종말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지식은 이제 그만 ‘국가와 사회에 유용한’ 무엇이 되기를 그쳐야 한다. 유용성의 강박에서 벗어나 삶 자체 곧 존재론이 되어야 한다. 존재와 생성, 그 자체로서의 앎!

  

연암은 말한다. “천하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글을 읽는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연암집> ‘원사(原士)’에서) 글이 천하를 태평케 한다고? 이거야말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지향점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저 어딘가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당장 구현되어야 한다. 지식과 삶 사이의 무수한 격자들을 넘어서는 거침없는 운동을 통해서! 연암의 공부법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쓴이 / 고미숙

· 고전평론가
· <연구공간 수유+너머 www.transs.pe.kr> 연구원
 · 저서 :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그린비, 2007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아이세움, 2007
           『나비와 전사』, 휴머니스트, 2006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휴머니스트, 2004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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