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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 사양하고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 이 네 가지의 마음을 사단(四端)이라 말합니다. 이 단(端)의 뜻은 단서(端緖)의 서(緖)가 아니라 주자(朱子)이전의 고훈(古訓)인 수(首)나 시(始)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가 다산의 선배 학자이던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이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 경학(經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는 대전환기의 일대 사건이 거기서 발단합니다.
“인의예지라는 것은 행사(行事)로 베풀어진 이후에야 바야흐로 그 이름이 있게 된다”(仁義禮智者 施諸行事而後 方有是名 : 示兩兒)라고 다산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실하게 선언했습니다. 이 원칙이 바로 다산 경학의 대전제이고 기본적인 원칙이었습니다. 인의예지를 이치(理)라는 개념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살구씨나 은행씨처럼 박혀 있다고 여기던 성리학자들에게 본질적인 반기를 든 내용이 바로 거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의 핵심을, “옛날 명례방에서 강학할 때에 이미 이런 학설을 들었는데, 이거야 바로 옛날의 해석(주자 이전의)이다”(昔講學于明禮坊 已聞此說 此是古訓)라는 주(註)를 달아서 명례방, 오늘의 명동지역에서 녹암 권철신선생이 강학할 때에 들었던 학설이라는 것입니다.
성호 이익의 친자(親炙)문인으로 이익의 학통을 이을 당대의 학자로 추앙받았으며, 다산의 중형 손암 정약전이 집지하고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던 스승이던 녹암의 경전해석을 다산도 젊은 시절에 직접 배워서 자신의 학설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증거가 거기에서 발견됩니다. 그런 학자가 불행하게도 1801년 신유옥사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고문치사 당하고 마는 비운을 당합니다.
다산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 뒤 「녹암 권철신 묘지명」이라는 비통한 녹암의 일대기를 저술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높은 수준의 경학세계를 소상하게 밝혔습니다. 다산의 위대한 학문도 성호나 녹암의 뛰어난 선학들의 영향아래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치가 아니라 행위와 일이라는 실학적 경학이 거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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