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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이 공부 잘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지 않을 부모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고향에 아들들을 두고 천리 타향의 먼 바닷가에서 유배살이 하던 다산의 아들들에 대한 애정과 걱정은 참으로 간절했습니다.
“너희들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둘째의 글씨체가 조금 좋아졌고 문리(文理)도 향상되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는 덕인지 아니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덕인지 모르겠구나. 부디 자포자기하지 말고 마음을 굳게 먹고 부지런히 책을 읽는데 힘쓰거라. 글을 골라 뽑아 적는 일에나 저서하는 일에 혹시라도 소홀하게 여기지 말아라. 폐족이면서 글도 못하고 예절이 바르지 못하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보통집안 사람들보다 100배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겨우 사람 축에 낄 수 있지 않겠느냐. 내 귀양살이 고생이 몹시 크긴 하다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큰 애가 4월 10일께 말을 타고 오겠다 했는데, 벌써 이별할 괴로움이 앞서는구나. (1802. 2월 7일)”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서의 귀양살이가 시작되었던 다산. 그 해 연말을 보내고 1802년 새해를 맞자 다산은 41세의 나이가 됩니다. 강진에 귀양 살면서 고향의 아들에게서 첫 번째의 편지가 오자 2월 7일 답장으로 처음 보낸 편지의 전문입니다. 참으로 짤막한 편지이지만, 이 편지에는 애간장이 녹아날 정도의 간절한 아버지 다산의 정이 담겨 있습니다.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여 폐족으로서의 신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라는 내용도 간절하고, 나의 고생이야 말할 수도 없이 크지만, 너희가 제대로 공부만 잘 한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겠다는 아버지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더 기막히는 대목은 마지막 문장입니다. 귀양살이 타향에 아들이 찾아온다니 정말로 기쁘고 반가운 일이겠지만, 만나는 반가움에 앞서 또 다시 헤어져야 할 비애가 더 먼저 생각난다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처지입니까. 그러나 다산은 비애에 절망하지도 않았고, 위기에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위기와 비애를 딛고 일어나 절망과 좌절을 극복하여 위대한 학문의 대업을 이룩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비애를 극복하던 과정은 슬프고 비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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