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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 성인(聖人)도 하지 못한 ‘가화만사성’ / 이지양

문근영 2010. 4. 26. 01:14

성인(聖人)도 하지 못한 ‘가화만사성’


이 지 양(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혼자 있는 시간에는 외롭고 우울해 하거나 불안해하긴 커녕 배운 것을 열심히 익히고, 멀리서는 친구들이 그를 보고 싶어 천리 길도 마다않고 찾아 왔으며,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가 나지 않을 만큼 이미 마음에 자족감이 가득한 남자. 그 멋진 남자는 공자였다. 그가 한가로이 있는 모습은 환하고 편안하며 온화해보였다고 『논어』에 전한다. 『논어』를 읽어가며 공자를 상상해보면 그는 정말 요즘의 눈으로 봐도 굉장히 훌륭하고도 멋있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공씨삼세출처(孔氏三世出妻)’란 아픈 꼬리표가 붙어 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후서(後序)에는 그의 아버지 숙량흘, 그의 아들 백어, 그의 손자인 자사가 모두 자기 아내를 쫓아낸 사람으로 전한다. 공자 자신도 아내 기관씨( 官氏)와 사이가 좋았던 것 같진 않다. 아들 공리를 낳은 것 외에는 별로 전하는 바가 없고, 노나라 소공 때 난리가 나서 공자가 제나라의 이계 땅으로 피난 갈 때, 아내가 남편을 따라가지 않고 송나라로 가버렸다는 것을 보면 공자 역시 화목하게 해로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까마득한 옛날, 그 시대 환경과 역사 속에, 남의 가정 일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마는 공자의 집도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3대 결손 가정인 셈이다.


순임금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아동학대가장


어디 그뿐인가. 신화적 성군인 순임금, 그의 아버지 ‘고수’는 전형적인 아동학대 가장이었다. 『맹자』 「만장」편에 의하면, 그는 ‘아들인 순(舜)을 죽이려고 순에게 창고(倉庫)의 지붕을 고치게 하고는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질렀으며, 우물을 파도록 시키고서는 순이 못 나오도록 흙을 쳐 넣어 메우는 등 그가 하는 짓이 착하지 못했다’고 한다. 순은 그럴 때마다 번번이 그 낌새를 눈치 채고 꾀를 내어 자기 목숨을 스스로 구했으며, 그렇게 살아나서 아버지를 섬기며 아들 노릇을 다 했다고 하는데, 간혹 벌판에 나가 통곡하곤 했던 모양이다. 학대받는 스트레스를 그렇게 혼자 벌판에 나가 통곡하며 풀었던 듯하다. 가족이 화목을 이루는 것은 그렇게도 힘든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 지옥 같은 가정환경 속에서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에 대처하는 특수 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받고 나와 공자가 되고, 순임금이 되었던 것이니, 그들이 새삼 더욱 거룩해 보이기도 한다. 유교에서 ‘삼강오륜’을 생각해서 가족 상호간의 도덕 윤리를 그토록 강조하고  ‘가화만사성’이니,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그토록 강조한 것은 어쩌면 이분들이 겪은 고통을 승화하여 내 놓은 윤리적 해법이었던 것일까. 유교는 유난히 가족 간의,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 존중하라는 예법을 강조한다. 그것은 일방적이거나 수직적이지 않다. 도리어 낯설게 느껴질 만큼 상호간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한다. 부모는 자애로워야 하고, 아들은 효성스러워야 한다든가, 형은 친하게 대하고 아우는 공손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이 다 그런 상호존중 발상이다. 특히 부부간에 서로를 손님처럼 공경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 예법 역시 눈길을 끈다. 유교 윤리의 핵심은 ‘친하다고, 가깝다고 함부로 굴지 마라. 방심하지 말고 처음처럼 예절을 지키고 조심해라’ 인 듯하다. 그런 발상은 도덕적 자기반성에 기초한 것이 많아서 정말 숭고한 느낌이 들곤 한다.


하지만, 유교적 도덕사회의 맹점은 강자의 책임과 도덕을 강조하고 독려하는데 강했고, 약자의 보호를 구조적으로 해주는 장치를 개발하는데 취약했다는 데 있다. 고수 같은 폭력 가장, 아동학대 가장으로부터도 아이인 순의 지혜로 살아남아야 했지, 누구도 보호해줄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그 점은 여전하여 가정폭력이 그토록 난무하고 뉴스를 도배해도, 그 피해자를 보호할 현명한 제도와 장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다가 가출하면, 경찰과 법원이 그 아이를 다시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돌려보낸다. 가해자를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며 그 손아귀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아내가 맞아 죽을 지경이 되어 겨우 고발하면, 역시 가해자인 남편을 불러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그 손아귀로 돌려보낸다. 마치 다시는 사회를 시끄럽게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괴롭히라는 응원을 하듯이 말이다. 그런 판결과 뉴스를 접할 때마다 사회, 제도적 장치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 마치 온 사회가 범죄자나 가해자를 은연중에 편들고 있는 듯한 조직범처럼 느껴져 섬뜩할 때가 있는 것이다.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가해자에게 돌려보내서야


‘가정의 달’인 오월이 시작되고 있다. 가족 간에 화목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미 이 세상이 천국일 터―, 이 신록의 계절에 그런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하지만, 성인들도 ‘가화만사성’은 뜻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또한 가족관계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인들, 서로가 자기 뜻대로 그렇게 만난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어느 부분은 욕심을 접고 예의를 갖춰야 한다. 다만, 예의를 갖추기는커녕 폭력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피해자들을 사회가 보호해줄 제도와 장치를 개발했으면 한다. 제발 가해자를 보호자의 이름으로 바꿔 부르며 피해자를 다시 그 손아귀에 넘기는 일은 그만했으면 한다. 행정기관과 사법기관에서 버젓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가해자를 보호자라고 할 때는 거의 절망적인 심정이 된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떠넘기는 일이 어떻게 지금 세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가? 올해 오월에는 그 점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야말로 ‘가정의 달’에 참된 선물이요, 우리 모두가 행복에 한걸음 나아가는 길이 되지 않을까? 꼭 우리 함께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주 간절히―.

 


글쓴이 / 이지양

·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 논문:「연암 박지원의 생활 특징과 문화예술사상」(『한국한문학연구』36집, 2005)외 다수

· 저서 : 『홀로 앉아 금을 타고』, 샘터사, 2007

· 번역서(공역): 『역주 매천야록(상.하)』, 문학과지성사, 2005

                    『역주 이옥전집』, 소명출판, 2001

                     『조선후기 문집의 음악사료』,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0

                    『조희룡전집』, 한길아트,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