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문학 눈으로 세상 보기, 세상 눈으로 문학 보기 / 양영길 (시인, 평론가)

문근영 2010. 4. 7. 07:31

'문학 눈으로 세상 보기, 세상 눈으로 문학 보기'를 시작하며

우리 생활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문학적인 눈으로 살펴보거나 아니면 문학 속의 이야기를 우리 생활과 관련시켜 살펴보려고 한다.
문학은 우리 생활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일들을 보통 사람과 약간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방법과 원리를 이해하면 문학에 대해서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대부분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연재하려는 내용은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어떻게 보고 느끼고, 이것들을 문학적으로 어떻게 엮어갈 것인가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

 
문학의 본질을 넓고 깊게 이해하여 문학 시험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거양득(一擧兩得)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필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시작을 해서 풀어나가기 시작해야 이를 비판하면서 더 좋은 방안이 생겨나고 발전할 것이 아니겠냐는 생각에서다. 시험 위주의 문학교육은 언젠가는 벗어나야 훌륭한 문학 작품들이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가 사는 인근에 5일마다 열리는 민속 오일장을 들를 때가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 복잡한 일이 있을 때는 바다나 산을 찾기도 하지만 오일장을 찾기도 한다.
오일장에서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나의 고민과 갈등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느끼기도 하고, 내가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것들이 한낮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오일장을 이리저리 서성이다 보면, 나의 고민을 에워싸고 있던 것들이 나뭇잎이 붉게 물들었다가 하나둘 떨어뜨리고
옷을 벗는 나무와 같이 그 본질을 드러낼 때가 있다.


겸허해진다고나 할까. 여러 사람들의 삶 속에서 배워나간다고나 할까. 우리들은 입과 코를 통해서 자연 속의 산소를 호흡하고 눈과 귀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문화를 호흡하면서 살아간다. 산소의 호흡과 식생활로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듯이 문화의 호흡과 그 생활로 정신의 건강을 지켜나간다.


자, 우리들의 주변을 한 번 둘러보자.
사람 사는 여러 가지 이야기에서부터 우리의 삶의 터전인 자연이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지 않은가. 이 모두가 문학적 소재이자 문학적 상상력의 에너지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은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직업에 따라, 사는 곳에 따라,
그리고 구체적인 체험과 경험에 따라 각각 다르다. 우리들 주위에서는 문학을 너무 멀리서 찾으려 하거나 또, 어렵게 여기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곁에 있다. 연재되는 글들을 읽고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고 깊게 하면서 쓰고자 하는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관찰과 사색의 글쓰기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부담스럽다. 그냥 친구들과 대화하듯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각들을 질서 있게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잘 써야 한다는 욕심이 많으면 오히려 풀리지 않고 고생만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부담이 많아지면 생각하는 것이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써야할 주제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남의 이야기 쳐다보듯 생각하면 쉽게 풀리는 경우도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생각이나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누구나 어디에나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글쓰기는 더욱 중요한 자기표현 수단이 되고 있다. 글쓰기와 담을 쌓고 살아가기가 점점 힘든 세상이 되고 있다. 대학 입학을 위해서나 취직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도 며칠 동안 고민을 거듭하고도 부족하여 도움을 요청할 때가 있듯이,
학교 신문이나 교지에 자기의 글이 실린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직장의 사보에 실린다면 글쓴이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기도 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방법으로 글쓰기보다 품위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글을 잘 쓰는 것을 문학적 소양이나 학식 있는 활동으로 생각하기 때문일까. 한 편의 글을 완성했을 때의 기쁨은 글을 써 본 사람만이 아는 기쁨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사진 찍기를 예로 들 때가 있다. 사진작가들이 사진을 잘 찍는 비결, 그것은 카메라 조작 방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찍을 대상을 어떻게 찾아가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진작가들이 좋아하는 시간은 보통 사람들이 잠에 빠져 있는 새벽녘이거나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쁜 저녁 무렵의 시간이다.
일출 전과 일몰 후에 잠시 동안 하늘이 희미하게 밝은 박명(薄明 twilight)의 시간을 사진작가들은 좋아 한다.


이 시간은 빛의 변화를 매우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분 안팎의 시간이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그 아름다운 빛의 잔치를 실감하지 못할 경우가 많다. 이 빛의 잔치를 관찰하고 앵글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남보다 부지런해야 한다. 새벽 사진을 준비하며 잠을 청하는 사진작가의 설렘을 상상해 보라. 예술 사진은 이 설렘이라는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쓰기 위한 관찰도 사진 찍기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얼마나 집요하고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말을 보면 관찰이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말은 글쓰기의 대상에 대한 관찰의 방법을 이야기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상에 대한 애정이 곧 관찰의 기본인 셈이다. 관찰은 경험의 폭을 넓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독서만 하고 관찰하지 않고 글을 쓴다면 그것은 머리로 쓴 글이며, 관찰만 하고 독서를 하지 않고 쓴 글은 편협한 아집에 빠진다고 했다.


그러나 관찰의 대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 우리 일상에서부터 나 자신의 어떤 문제를 사색하고 고민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관찰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오시열의 「손톱에 뜬 달」 전문이다.

일곱 살 막내의 손톱을 깎는다.
아직 단단하지 않은 조개 손톱 끝,
또각또각 경쾌한 리듬

아이의 손톱 조각 하나 초승달로 뛰어 올라 하늘에 걸린다.
달 위로 폴짝, 그네 타는 아이.
별과 별의 꼭지점에서 함께 흔들리는 웃음소리.
내가 가졌던 저 짙은 눈망울 안으로 총총 들어앉는 별빛

일흔 넘은 어머니의 손톱을 깎던 날.
내 가슴 안으로 그믐달 들어와 박혔다.
옹이로 굳어진 겹겹의 세월.
딱, 딱, 힘겹게 깎이는 어머니의 가슴처럼 두터워진 손톱,
깎는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젖은 눈

내 손톱을 본다.
바오밥 나무의 상징처럼 허공으로 자라나는 질긴 뿌리.
이제 적당히 눌려 굳어진 세월의 켜켜,
밀어낸 길이만큼 깎여진 불투명해지는 불혹의 뿌리

다시 아이의 손톱을 깎는다.
아이의 손톱에서 노란 달맞이꽃 퐁퐁 피어난다.
어릴 적, 어머니와 손잡고 바라보던….

이 시는 평범한 일상을 관찰하고 쓴 일상시이다. 평범한 가운데 세월을 넘나들면서 추억을 엮고 있다고나 할까. 막내만큼의 어렸을 적 엄마와의 추억을 막내와 더불어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막내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렸을 때의 모습을 읽어내고 있다고나 할까. 손톱을 깎으면서 어렸을 때 관찰했던 것들을 찾아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만의 관찰이 또 하나 있다.
"노란 달맞이꽃이 퐁퐁 피어난다."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달맞이꽃은 낮에는 시든 것처럼 꽃잎을 오므리고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꽃잎을 펴든다. 그 피어나는 순간을 보면 서서히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터지듯이 피어난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어서 일부러 관찰하지 않으면 결코 살펴볼 수 없는 풍경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피었거니 쳐다보는 달맞이꽃을 시인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자연의 경이로움을 몰래 간직하고 있다가 일곱 살 막내에게서 그 모습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고자 한다면 그 대상을 찾아 섬세하게 관찰하라. 그러면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되리라. 읽을만한 글은 관찰을 바탕으로 하는 사색의 깊이와 넓이를 느낄 수 있는 글일 것이다.

결합과 용해의 미학 원리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것은 '이외성'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외성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미처 발견해내지 못한, 또는 너무 흔해서 관심이 없던 것에서부터 나온다고 할 것이다.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았다고나 할까. 이러한 이외성은 발상의 전환에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반짝이는 아이디어의 원리는 결합에 있다. 서로 별개의 것들끼리 결합하고 그것이 용해되어 가치 있는 것이 만들어져 새로운 또 하나가 탄생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한참 화제 거리가 되었던 퓨전 음식의 '퓨전(fusion)'도 이런 결합의 원리에 의한 것이다. 용해, 융해의 뜻으로 쓰이는 퓨전은 여러 문화가 섞여 새로운 문화로 탄생하는 것이다. 음식의 경우만이 아니라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결합,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의 결합, 현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의 결합, 원시적인 것과 문명적인 것의 결합 등 모든 것들은 결합에 의해 창조적인 활동이 이루어진다.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도 이와 같은 결합의 원리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별개의 것들이 결합하여 '어떻게 용해되느냐' 에 따라 주제가 달라지고 또 문학성의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들이 흔히 접하는 연속극의 경우를 보면, 주인공들을 상반되게 결합시켜 시청자들의 긴장을 이끌어내는 경우도 있다. 부잣집 남자 주인공과 보잘것없는 여자 주인공이 서로 결합을 시도하면 그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청자들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다.


거꾸로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잣집이라고 하면 으레 경제적인 측면만 강조되게 마련인데 이와 상반된 처지의 상대방과 사랑에 빠지면 여러 가지로 장애를 만나게 되고, 그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의 순수성 같은 것을 호소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상반된 결합의 효과를 이용하여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속극만이 아니라 요즘 청소년들이 읽는 인터넷 소설이나 환타지 소설에서도
'이외의 결합'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외성을 통해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여행할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환타지 소설의 경우는 현실과 비현실이 결합하여 새로운 소설 장르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시의 표현에서도 이런 결합과 용해의 원리를 볼 수 있다. 별개의 것을 하 나의 주제 밑에 질서 있게 써 놓은 것이라고나 할까.

졸시 「시집을 읽고 있으면」을 보기로 하자.

깊은 밤에 시집을 읽고 있으면
등 뒤에 새 한 마리
나를 지켜 앉아 있었지
기억의 뜰
어느 모퉁이에
나도 모르게 잠자고 있던
여름내 키운 초롱꽃 같은 꿈 하나
지금도 가득 찬 그녀의 눈빛 같은
돌아보면 고요 하나 떨구고 날아가 버리는
노랑지빠귀
귓속에 대고 무어라 속삭일 것만 같은 이 밤
누구를 위해 창문을 여는가
문 밖에는 가을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시집 대신 찻잔에 남은 향기를 따라
우리는 바닷가에 서 있었지
알지 못할 사랑의 정체를
저 바다 위로 떠나보내도
아직은 나의 뜰을 적시는데
나는 멀리 멀리 여행을 떠나지
바람 따라 흘러 흘러 머무는 그 어디쯤에서
지금껏 흘러온 내 어릴 적 사랑 이야기 펼쳐 놓고
우리는 한 줄의 시를 썼었지
한 알의 꽃씨만한 글줄에 눈이 머물고
바다는 더욱 파랗게 출렁이고 있었지
우리들 가슴 위로 파도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지

필자의 시를 가지고 이야기하기가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시집을 읽다가 상상의 세계를 펼치고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게 하는 장식적 요소라고 한다면 '노랑지빠귀' 라든가 '가을비', '찻잔'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내용과 크게 관련되지는 않지만 시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이 또한 결합과 용해의 원리라 할 것이다.


이렇게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것을 끌어오는 것이 시인의 상상력이지만, 그것이 따로 놀지 않고 작품에 영향을 끼쳐 땔래야 땔 수 없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결합과 용해의 미학 원리'를 잘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시의 주된 기교인 은유도 이런 결합의 원리에 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결합과 용해의 미학 원리'는 문학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것을 결합시켜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의 생활은 생동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양영길
제주대학교 국문과 졸업, 제주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9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4년 월간 "순수문학" 평론 부문 신인상 수상,
제주도독서교육연구회장, 영주어문학회 부회장.
시집 <바람의 땅에 서서>, 5인 공동시집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 >와
연구논저 <한국문학사 인식 어떻게 할 것인가>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