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시대와 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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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바람, 케네디의 등장
케네디 시절, 흑인운동의 커다란 진전
1962년에 제임스 메레디스가 미시시피대학교에 입학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인 학생들의 방해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케네디는 연방 보안관 4백여 명과 군인 3천명을 보내서 메레디스가 첫 학기에 등록하도록 했다. 애초에 대통령으로서 케네디는 민권을 위한 민초들의 운동이 남부의 많은 백인들을 성나게 할 뿐 아니라 민권법안들이 남부 출신 민주당원들이 지배하는 하원을 통과하는 것을 더 어렵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그 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그 결과 많은 민권 지도자들은 케네디가 그들의 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보게 되었다. 1963년 6월 11일 케네디 대통령은, 앨라바마 주지사 조지 월러스가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을 가리킴)인 두 학생이 앨라배마대학교에 등록하지 못하도록 정문을 막자 개입을 했다. 연방보안관들과 앨라배마주 방위군이 닥치자 월러스는 비켜섰다. 그날 저녁 케네디는 전국에 나가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그 유명한 민권 연설을 했다. 케네디는 1964년에 민권법으로 제정될 내용을 그때 제안했던 것이다. (<위키피디아>, ‘존 F. 케네디’ 항목에서) 그러나 이렇게 혁신적인 정책을 실행한 케네디도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받던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한 수많은 개인들을 연방수사국(FBI)이 도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도청은 나중에 킹에게 치명적 타격으로 나타난다) 린든 존슨(케네디의 후임 대통령)은 1967년 ‘새해 의회 연설’에서 과거(케네디 행정부 시절)의 염탐질과 도청에 관해서 말했다. 비록 존슨도 킹을 계속 도청했지만. 1. 말콤 엑스와 버락 오바마 케네디에서 존슨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획기적으로 성장한 흑인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는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2세였다. 모두 암살을 당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두 사람의 운동 노선과 이념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나는 이 책을 쓰려고 여러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넘는 말콤 엑스와 킹에 관한 연구와 평가가 아직도 활발함을 보고 놀랐다. 킹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1960년대 초를 전후로 미국과 국제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로 급진적이었던 말콤 엑스를 광범위하게 다루는 웹사이트가 있다는 사실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오늘의 미국, 특히 흑인들의 현실과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두 지도자를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오바마와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정반대 성향도 강한 말콤 엑스를 자세히 보기로 하자.
흑인운동에 열성적인 아버지와 백인의 피를 증오한 어머니
말콤 엑스의 원래 이름은 말콤 리틀(Malcolm Little)이었다. 1925년 5월 19일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라는 도시에서 태어난 그의 자서전 <말콤 엑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언젠가 어머니가 내게 이야기해준 바에 의하면,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던 어느 날 밤, 두건을 쓴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약칭 KKK단-남북전쟁 후 흑인 및 북부인을 폭력으로 억압하기 위해 남부 여러 주에 결성된 백인들의 비밀결사. 1871년에 불법화되었음-옮긴이) 단원 한 패거리가 말을 타고서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시에 있는 우리 집에 쳐들어왔다. 그자들은 집을 포위하고 엽총과 소총을 휘두르며 아버지에게 나오라고 고함을 질러 댔다. 어머니가 앞문으로 나가서 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임신 중임을 그자들이 똑똑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지금 혼자 꼬마 셋을 데리고 집에 있으며 아버지는 설교를 하러 밀워키에 출타중이라고 말했다. 클랜 단원들은 아버지가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 1887~1940. 자메이카 태생의 미국 흑인 지도자-옮긴이)의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라는 주장을 오마하의 ‘선량한’ 흑인들 사이에 퍼뜨리면서 ‘말썽을 일으키는’ 꼴을 ‘선량한 백인 기독교도들’이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으니 우리 가족이 마을에서 떠나는 게 좋을 거라고 어머니에게 큰소리로 협박 겸 경고를 했다. (이것이 알렉스 헤일리가 취재하여 구성한 <말콤 엑스>의 제1장 ‘악몽’의 첫 문단이다.)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자주 본 공포의 단체 KKK,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빼꼼히 드러낸 채 말을 타고 총칼을 휘두르면서 흑인들과 인권운동자들의 집에 불을 지르거나 린치를 가하는 자들. 말콤 엑스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그들의 끔찍한 행태가 장차 자기가 맞서야 할 인종주의자들의 본질임을 예감이나 했을까?
이 책의 두 번째 문단은 말콤의 아버지가 1917년이라는, 미국 흑인운동의 암흑기에 얼마나 과감하게 진취적으로 살고 싸웠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의 아버지, 얼 리틀(Earl Little) 목사는 침례교회 순회목사인 동시에 마커스 오렐리어스 가비가 세운 세계흑인개선협회(UNIA)의 열성적인 조직담당자였다. 가비는 아버지와 같은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뉴욕시의 할렘에 있는 본부에서 흑인종 순수성의 기치를 치켜들고, 흑인 대중은 선조의 고국인 아프리카로 돌아가라고 열렬히 권고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가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말썽 많은 흑인이 되어 있었다. (<말콤 엑스> 상권, 22쪽)
말콤 엑스는 버락 오바마처럼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말콤의 어머니 루이즈 리틀(Louise Little, 처녀 적 이름은 루이자 노턴[Louisa Norton])은 엄밀하게 따지면 정상적인 결혼으로 태어난 백인이 아니었다. 말콤은 스코틀랜드계인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수치였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는 “내 안에 흐르는 백인 강간자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증오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진술로 미루어보면, 말콤 엑스의 어머니는 ‘순수한’ 백인 혈통으로 높은 지적 수준을 지녔던 버락 오바마의 어머니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말콤의 아버지는 키가 192센티미터나 되는 거한으로서 피부색은 아주 까맣고, 외눈박이였다. 말콤은 아버지가 한 눈을 잃은 까닭을 모른다고 했는데, 어쨌든 아버지는 조지아주에서 태어나 학교 교육이라고는 3,4년밖에 못 받은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형제 여섯 명 중에서 셋이 백인에게 살해되고, 다른 한 사람은 린치를 당해 죽었다. 바로 그것이 얼 리틀이 목숨을 걸고 흑인 사이에 ‘아프리카로 돌아가자’ 라는 철학을 전파하기로 결심한 동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버지마저도 의문의 비명횡사를 하게 된다.
아버지는 피부색이 가장 연한 말콤을 편애
말콤 엑스는 ‘깨어 있는 흑인’이었던 아버지조차도 하얀 피부에 대한 동경심이 아주 강했다고 회상했다. 말콤은 일곱 번째 자식이었는데, 아버지는 남매들 중에서 피부색이 가장 연한 말콤을 편애했다. 말콤이 어머니의 유전자를 가장 많이 받은 ‘물라토’(mulato, 중남아메리카의 혼혈 가운데 백인과 흑인의 제1대 혼혈아를 가리키는 말. 머리칼은 흑인을 닮아 곱슬머리지만 피부는 밝은 갈색부터 암갈색까지 다양하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말콤 엑스 공식 웹사이트>(THE OFFICIAL WEB SITE OF MALCOLM X)에 실린 그의 40대 시절 사진들을 보면서 ‘안경을 벗고 턱수염만 깎는다면 오바마하고 참 많이도 닮았겠다’고 생각했다. 훤칠한 키에, 흑인으로는 ‘백인적 요소’가 강한 이목구비, 곱슬머리, ‘순 아프리카계 흑인’보다 훨씬 밝은 피부…. 그렇다면 오바마도 어린 시절에 ‘물라토’처럼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까?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소재가 아니라 미국사회에서 외모와 피부색이 청소년의 정신적 성장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다시 얼 리틀 목사로 돌아가 보자. KKK단을 비롯한 백인 인종주의자들과 흑인을 억압하는 세력에 쫓겨 미국 이곳저곳으로 이사하면서도 ‘흑인의 아프리카 귀환’ 운동에 열성적이던 그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1931년에 얼 리틀은 (미시건주) 랜싱에서 전차에 치었다. 당국은 그가 사고로 죽었다고 판정했다. (···) 말콤 엑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흑인사회는 그의 사인에 대해 논박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그룹인 ‘검은 군단’(Black Legion)의 괴롭힘을 자주 당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 그룹이 1929년에 그들의 집을 태웠다고 비난했다는 것이었다. 어떤 흑인들은 검은 군단이 얼 리틀을 죽였다고 믿었다. 어떻게 얼 리틀이 ‘자기 머리를 강타하고 전차 선로에 가서 치어 죽을 수 있겠느냐’면서. (<위키피디어>, 말콤 엑스 항목 중 ‘초년기’에서)
말콤 엑스가 나중에 갖은 범죄와 타락의 수렁에 빠져 헤매다가 미국 흑인과 세계 아프리카인들의 단결과 자립을 위한 운동의 강력한 지도자로 태어났을 때, 그는 알렉스 헤일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버지의 두개골은 한쪽이 으스러져 있었다고 한다. (···) 아버지의 몸뚱이는 거의 두 동강이 나버렸다. (<말콤 엑스> 상권, 35 쪽)
어린 시절에 집이 불길에 휩싸이고, 이복까지 열 명이 넘는 남매들이 가난과 핍박을 당하고, 결국에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까지 겪은 말콤 엑스가 그 모든 공포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흑인 해방의 투사로 태어난 것은 불가사의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 과정은 뒤에서 다시 보겠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존재로서,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던가?
아버지는 아프리카 사람이었다. 케냐의 루오족 출신으로 알레고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빅토리아 호 주변이었다. 마을은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아버지는 뛰어난 농부였고 마을의 원로이자 의사였다. 나에게는 또 한 명의 할아버지이고, 함자는 후세인 온양고 오바마이다. 아버지는 염소를 치며 영국 식민지 정부가 세운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장래성을 보였고, 마침내 장학금을 받으며 나이로비에 유학했다. 그리고 케냐가 독립하기 전날, 아버지는 케냐의 지도자들과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선발되어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의 기술을 배워 새롭고 현대적인 아프리카 건설에 기여하게 한다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대규모로 외국에 파견한 아프리카인 1세대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던 것이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Dreams from My Father], 버락 오바마 지음, 이경식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년 7월. 39쪽)
말콤 엑스는 ‘흑인의 정체성’을, 오바마는 ‘미국의 통합’을
오바마가 2008년 6월에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되기 오래 전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순 아프리카인’이었고, 그의 조상은 백인들 밑에서 종살이를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어머니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미국 흑인사회에서는 오바마의 ‘흑인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흑인들의 압도적 지지가 필요했던 오바마에게 이것은 가장 먼저 풀어야 할 과제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바마는 이런 의문을 극복하고, 흑인 대중의 지지를 많이 받던 힐러리 클린턴을 압도하고 대통령후보로 확정되었다.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예비선거뿐 아니라 본선에서도 크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흑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지 않고 ‘미국의 통합’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유권자들이 21세기의 첫 10년이 오기도 전에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뽑으리라고는, 오바마가 2007년 2월 10일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대통령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하기 전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예상을 뒤엎고 ‘오바마 대통령’을 만들어낸 그 자신과 선거캠프, 그리고 민주당의 전략에 관해서는 뒤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오바마에 비하면 말콤 엑스는, 어머니가 백인의 강간으로 태어난 ‘백인’이었다는 사실 말고는 철저히 흑인의 정체성을 가졌고, 흑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목숨을 바친 사람이었다.
말콤은 중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8학년(우리나라의 중학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해버렸다. 어느 날 백인인 영어선생과 나눈 대화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말콤, 너도 장래 직업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한다.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니?” 사실 나는 생각도 안 해보았었다. 그런데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네, 생각해봤습니다, 선생님. 변호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 당시 랜싱에는 분명 흑인 변호사가 -의사도 물론-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내가 그런 야망을 품도록 인상을 심어줄 사람이 없었다. 내가 실제로 확실히 아는 것은 변호사가 나처럼 접시를 닦지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오스트로우스키씨는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두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가서 깍지를 꼈다. 그는 어렴풋이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말콤, 인생에서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건 현실적인 자세다.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마라.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너를 좋아한다는 건 너도 알 거야. 하지만 넌 깜둥이라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알아야 해. 너는 네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너는 물건 만드는 손재주가 좋지. 모두들 목수 솜씨를 높이 쳐준다. 왜 목수일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니? 사람들이 인간적으로는 너를 좋아하니까 일거리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거야.” (<말콤 엑스> 상권, 75쪽)
이 짧은 대화가 말콤 엑스의 정규교육을 끝내버리는 ‘도끼질’이 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어머니는 인사불성 상태로 병원에 갇혀 살고, 남매들은 풍비박산이 된 채, 소년원 생활을 하던 그는 8학년이 끝나는 날 학교를 그만두고 이복누나인 엘라가 사는 동부 매사추세츠의 보스턴으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탄다.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말콤, ‘막장 인생’의 길로
보스턴에서 말콤이 구한 첫 직업은 나이트클럽의 구두닦이였다. 그는 ‘밤의 세계’에 살면서 출세한 흑인들이 백인 흉내내기를 하는 것을 날마다 보면서 그것을 따라한다. 콩크’(conk-곱슬머리를 약물로 풀어 백인처럼 보이게 하는 것)가 그 대표적인 보기였다. 그는 보스턴과 뉴욕을 오가는 열차에서 물건을 팔기도 하고 접시닦이도 하다가 27세 때인 1943년에 뉴욕시의 할렘으로 ‘진출’한다. 할렘은 세계 최대 도시인 뉴욕의 흑인 빈민가로서 범죄와 타락의 소굴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는 거기서 밀매, 도박, 사기와 공갈, 강도, 뚜쟁이 같은 ‘막장 인생’의 거의 모든 분야를 경험한다.
1945년 말 다시 보스턴으로 간 말콤은 패거리들과 함께, 부유한 백인 주택들을 털다가 이듬해 1월에 체포되어 8년 징역을 선고받고 매사추세츠주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의 자서전을 이 대목까지 읽어보면 동서양에서 나온 어떤 소설에 못지않게 범죄 경력이 화려하고 다양하다. 나중에 흑인사회뿐 아니라 아프리카 민중운동 진영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하나가 된 인물의 과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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