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영혼

마하트마 간디와의 만남

문근영 2010. 3. 25. 10:25

물 한 잔을 밥 한 상으로 갚고
한마디 정다운 인사에 넙죽이 절을 하며
피천 한 푼을 금으로 갚고
네 목숨을 건져줬거든 목숨도 아끼지 마라.
모든 어진 말과 행동을 그렇게 존중하고
조그만 섬김도 그 갚음은 열 곱으로 하라.
그러나 참 성자는 만인을 하나로 알아
기쁘게 선으로써 악을 갚느니라.
- 구자라트의 한 교훈시

 

내가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Gandhi, Mohandas Karamchand, 1869~1948)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우연히 로망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의 <마하트마 간디>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이 간디에 대한 첫 만남이었다.


간디의 사상은 나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며, 로망스 루아(Laurence Roy)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레 하나와 소금 한줌으로 무장한 채 3억의 인도인을 봉기시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식민지 권력을 무너뜨린 인물이다.


그의 투쟁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것이었으며, 사랑과 진리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그의 첫 투쟁은 영국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된 후 1893년 남아프리카에서 소송사건을 맡게 된 때이다. 그가 1등칸을 여행하던 중 백인에 의하여 차량 밖으로 난폭하게 내던져지게 되었고 이 사건을 통하여 인도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남아 인도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하였고, 나탈 인도 국민회의를 설립하는 등 인권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모욕을 당하게 되었을 때 간디와 같은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비범함은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남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가짐,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에 있었다. 그는 거짓된 정의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진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사티아그라하’란 진리의 힘이라는 뜻으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의미한다. 이것은 소로(Thoreau, Henry David, 1817~1862)의 시민 불복종 운동과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의 기독교적 평화주의, 그리고 자이나교의 비폭력 사상을 결합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폭력이 폭력보다 무한히 우위에 있음을, 용서가 처벌보다 휠씬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비폭력은 온 영혼의 힘으로 전제군주의 의지에 맞서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국에 맞선다면 그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로망 롤랑의 <마하트마 간디>, 1924

 

비폭력 사상만큼 내 가슴을 감동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20세기 초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을 때 우리나라의 국민들도 평화적 운동인 3.1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들의 발포에도 무릅쓰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였던 모습을 상상하면 진한 감동과 함께 눈물이 고인다. 간디의 소금 행진은 이와 유사하다. 그것은 영국이 독점으로 소금을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여, 해변을 행진하며 소금을 채취하는 불복종 운동이었다. 이 소금 행진에 대한 웹 밀러 기자의 증언은 깊은 감명을 준다.

 

“완벽한 침묵 속에서 줄지어 걷던 간디의 사람들은 철조망에서 100야드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선택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열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철조망 가까이 다가섰다. 갑자기 스물여 명의 원주민 경찰들이 명령에 따라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달려들며 강철을 입힌 곤봉으로 마구 머리를 쳐댔다. 그러나 시위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곤봉을 막으려고 팔을 들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볼링 핀처럼 무너졌다. …… 얻어맞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이한 자세로 쓰러져 갔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 두개골이 깨진 사람, 부서진 어깨의 고통 때문에 몸을 비튼 채 쓰러진 사람….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열을 이탈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며 얻어맞고 쓰러질 때까지 행진을 계속했다. 그들 모두가 몇 분 후면 얻어맞아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는데도 망설임이나 두려움의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당당하게 든 채 휘청거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루이 피셔의 <마하트마 간디의 삶>, 1952

 

간디의 비폭력 사상은 나에게 크나큰 감명을 주었고, 나는 이것을 내 인생의 중요한 지침과 신념으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비폭력 사상 외에도 종교에 대한 간디의 태도 역시 나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인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에서, 신약성서의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것을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과 통일해 보려고 시도하였다고 고백한다. 그 결과 그는 내버림이야말로 종교의 최고 경지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이 책에는 기독교도와 교제하면서 느낀 일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의 인권운동을 위해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기독교도 친구가 그로 하여금 기독교를 믿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유일의 진리인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결코 구원될 수 없으며, 예수의 중보 없이는 죄를 씻을 길이 없고 모든 선행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간디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내 죄의 결과에서 속죄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죄 그 자체에서 속죄되기를, 또는 죄의식에서 속죄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 안정될 수 없음을 감수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들과의 교제는 대개 좋았으며, 그들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갖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공인된 해석에 관해서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간디는 성경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기독교의 제도적 틀 내지는 몇 가지 교리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힌두교도였음에도, 기독교도를 비롯한 다른 종교인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으며 열린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대하였던 것은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의 중심은 하나님과 진리에 있었지 종교 자체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신념을 평생을 걸쳐 실천하였던 간디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으며, 훗날 대학시절 종교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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