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요즘 걷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몇 년 전 제주도에서 ‘올레’라는 이름으로 걷기가 시작되더니 ‘지리산 둘레길’이 생기고 ‘언저리길’, ‘옛길’, 또는 ‘우리길’이라는 이름으로 지방마다 자기 고장을 내세우는 걷기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원래 걷기의 단초가 된 ‘올레’란 제주도에서 내 집 사립문에서 앞집 사립문까지를 말한단다. 올레와 올레가 이어지면 고샅길이 될 터이고 고샅이 이어져 마을길, 마을길이 이어지면 한길이 되어 마침내 온 나라가 실핏줄처럼 그물망으로 짜이게 될 것이다. 결국 올레란 집과 집을 연결하는 출발점이자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제주도가 바다와 오름, 토박이 정서의 길이라면 지리산은 숲과 계곡과 산골사람들과 함께하는 길이다. 그래서 올레길이 이국적인 특유의 정서가 배어 있다면 지리산 둘레길은 우리의 자연과 그 안에 고달픈 삶이 배어 있는 곳이다. 지리산 둘레길이 이제 네 개 코스가 열렸으니 지리산 800백리를 도는 길이 언젠가는 모두 열릴 것이다.
얼마 전 매동 마을에서 금계까지 반 토막을 걸으며 아쉬움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인월서 금계까지로 걷기로 했다. 안내 책자를 보니 약 20km에 5~6시간 걸린다니 이건 쉬엄쉬엄 걷는 길이 아니고 아예 부지런히 걸어야 할 것 같다. 당초 올레길이나 둘레길을 만든 까닭은 느림을 만끽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함인데 한 시간에 3km 이상을 걸어야 한다는 안내서를 보니 여유롭게 걷기는 틀린 모양이다.
인월에서 첫 걸음을 떼는 시간이 아침 9시, 산골의 9시는 아직 해가 앞 산 등을 오르기 전이다. 겨울이 물러가기에는 아직 멀어서 지난 밤 추위에 냇가 풀들이 하얗다. 방죽길을 따라 멀리 희미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걷는 출발이 좋다. 어린 시절 많이 걷던 방죽길이다.
중근마을에 도착하니 산비탈에 기댄 지붕위로 아침 햇살이 기웃거린다. 꿀과 잣으로 소득을 삼는마을이나 보다 예쁘고 앙증스러운 담벼락 그림을 뒤로 하고 마을을 돌아 산길로 접어드니 저 아래 계곡 마른 풀들이 아침 햇살에 노랗게 반짝인다. |
중군마을을 지나 갈림길에서 쉽게 걷는 계곡 길을 버리고 산비탈을 따라 황매암 길을 택한다. 내내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길이다. 황매암에 들려 합장배례를 하고 토방 옆 따스한 곳에 자리하고 차 한 잔 마시는 데 복스러운 강아지가 사람이 그리웠는지 주위를 뱅뱅 돈다. 빵 한 조각 던져주고 일어서니 꼬리를 흔들며 문밖까지 따라 나선다.
산등을 넘으니 그늘진 산굽이에 노천찻집이 자리하고 있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가끔씩 이런 찻집이나 간식을 파는 주점들을 만날 수 있다. 나주에서 시집 왔다는 이 아주머니는 인심이 후해서 차 한 잔에 이것저것 챙겨 주며 푸진 마음을 쏟아 낸다. 사는 일이란 누구나 고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일체유심조여서 비우고 살면 저렇게 평화롭나 보다.
다시 숲길을 돌고 오르다 비탈길을 내려간다. 너덜겅을 건너기도 하고 포실한 흙길을 밟기도 하고 각진 돌길을 돌아 넘기도 한다. 나무 그림자가 담긴 작은 샘터를 지나기도 하고 작은 돌멩이들이 놓은 곳에서 아픈 다리를 쉬기도 한다. 솔숲 바람소리, 새소리가 들리다가도 가끔은 적막에 쌓일 때도 있다. 오르막에서는 힘을 쏟지만, 편안한 길에서는 정겨운 대화가 열리고 아름다운 정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는 콧노래가 절로 나오기도 한다. 마치 굽이진 인생처럼 말이다.
숲길을 돌아 수성대에 다다르면 백련암 가는 길이 산비탈을 타고 길게 늘어져 있다. 백련암 길을 버리고 고개를 넘어 배넘이재에서 한숨 돌리고 비탈을 내려가면 장항리 뒷산이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노루목엔 우람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흔히 정자나무하면 느티나무인데 소나무여서 더 신성스럽다. 1600년 경, 마을이 형성될 때부터 함께 했다니 수령 400년이 넘은 셈이다. 정이품송보다는 품격이 떨어지지만 우람함으로는 비교될 게 아니다. |
장항리를 지나면 포근한 들길이다. 추위가 물러가고 햇살이 퍼져 등이 따사하다. 계곡 건너 길가에 관광버스가 둘레길 단체 관광객들을 쏟아내고 있다. 저기가 매동마을이니 반 토막 금계까지 가려나 보다. 매동마을은 얼마 전 3일이란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지리산 둘레길에서 갑자기 뜬 마을이다. 산의 품에 안겨 있는 이 마을은 둘레길의 출발점이 되거나 도착점이기도 하여 민박 체험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딱 좋은 곳이다. (인월서 이곳 까지는 9km에 3시간 조금 못 걸린다)
매동마을에서 금계까지는 지리산 둘레 길에서 가장 매력적인 코스이다. 약 11km에 천천히 걸어도 4시간이면 금계에 도달할 수 있다. 푸른 소나무 숲길과 마을을 내려다보며 걷는 길과 논두렁, 밭두렁 굽이진 길이 좋을뿐더러 지리산 준령과 천왕봉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어서 더더욱 좋다. 보름 전에는 눈이 하얗더니 벌써 다 녹아 마른 길이다.
한 시간 반 조금 못 미쳐 가면 중황리가 내려다보이는 논두렁길로 접어든다. 이곳엔 얼기설기 그늘막을 친 간이식당이 바람에 펄럭이며 굴둑에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아랫마을에 사는 나이 든 할머니 한 분이 국수와 파전, 동동주를 팔고 계신 곳이다. 인심이 좋을 뿐더러 성품이 구수하고 손이 커서 내 논 것들이 푸짐하다. 목마름과 피로를 풀어 주는 고마운 분이다. 지난 번 왔을 때 나이가 많아 누님이라 했더니 여럽다면서도 그 나이에 수줍어 하셨다. 멀리서 손을 흔들자 얼른 알아보고 두 손 들고 반겨 주신다. 파전이랑 무전을 듬뿍 내 놓으며 많이 먹으란다. 둘레길은 이런 재미로 걷나 보다.
여기서 등구재까지는 어린 시절이 회상되는 전형적인 시골길이다. 지난날 고단했던 삶의 현장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등구재를 오르기 전 계단 논을 보며 한 뼘의 농토라도 넓히기 위해 엄청난 노동력을 쏟아야 했던 농민들의 고단함에 가슴이 저려 온다.
등구재는 영남과 호남을 가르는 작은 고개이다. 옛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나들며 인월 시장을 다녔고 시집 갈 때 가마 안에서 많이도 울며 넘었던 고개이다. 지금도 이 곳 사람들은 영호남이 없는 한 가족처럼 산다.
등구재에서 잎갈나무 숲을 따라 내려가면 창원이다. 창원을 지나 금계까지는 40분정도 걸린다. 천왕봉을 바로 눈앞에 두고 숲길을 돌아 내려가는 재미가 좋아 꼭 금계까지 가볼 일이다. 마을 뒤편으로 돌아가는 실뱀 같은 좁은 길과 마른 풀섶 밭두렁 길이 좋고 푸른 소나무 숲 너머로 장엄한 천왕봉이 내내 함께 한다. |
금계에 떨어진 시간이 오후 4시, 중황리 할머니 집에서 가락국수와 동동주로 반시간 보냈으니 인월에서 여섯 시간 반이 걸린 셈이다. 이 또한 여유로움과 느림을 마다하고 바삐 걷는 결과여서 종아리가 조금은 탱탱하다. 주마간산처럼 휘적휘적 바삐 걸어온 것이 조금은 후회스럽다.
금계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인월까지 일만오천원이다.
걷는 것은 인생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가는 *문진(門津)이다. 살면서 부대끼고 짓누르는 고단함을 녹여내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고 싶다면 걸어볼 일이다. 두 다리로 걷는 것이 철학의 스승이라 했지 않는가? 소요학파가 그랬듯 사유란 걷는 것에서 나온다 했으니~~~
어느 길이고 좋다. 힘들지 않고 포근한 길이라면 걸어보라. 그래서 자연의 속살 안으로 들어가 우리 삶이 배어 있는 것들과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꽃 한 송이까지 사랑하며 내 것으로 만들어 본다면 이 얼마나 값진 일인가?
*門津-강을 건너기 위한 나루터, 인생을 성장시키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입문 과정을 뜻한다. 논어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