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邑內)에 있을 때 아전 집안의 아이들로서 배우러 왔던 사람이 4, 5명 되었는데 거의 모두가 몇 년 만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귀족 자제(子弟)들에 이르면, 모두 쇠약한 기운을 띤 열등생들입니다. 책을 덮으면 금방 잊어버리고 지취(志趣)는 낮은 데 안주해 버립니다.”
강진에서 귀양 살고 있던 정약용이 형님 정약전에게 편지를 썼다. 형님 또한 흑산도에서 귀양 살고 있던 처지였다. 정약용은 책을 쓰거나 상의할 일이 있으면 정약전 형님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그 편지 글에서 당시 학생들의 학문하는 세태를 한탄하고 있다.
“시(詩)ㆍ서(書)ㆍ역(易)ㆍ예(禮) 등의 경전 가운데 미묘한 말과 논리를 가끔 말해주어 그들의 향학(向學)을 권해보면, 그 모습이 마치 발을 묶어 놓은 꿩과 같습니다. 쪼아 먹으라 권해도 쪼지 않습니다. 머리를 눌러 억지로 곡식 낟알에 대주어 주둥이와 낟알이 서로 닿게 해주어도 끝내 쪼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어찌 공부를 억지로 시킬 것인가. 먹이를 던져 주어도 스스로 먹지 않으면 소용없다. 말을 냇가에 끌고 가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스스로 공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어야 한다.
“남자는 모름지기 맹금이나 맹수 같은 사나운 기상(鷙猛猾賊의 氣象)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바로잡고 다듬어야 비로소 쓸모 있는 인재가 되는 것입니다. 선량한 사람은 제 몸 하나만을 선하게 하기에 족할 뿐입니다.”
다산은 공부를 좀 한다는 학생들에 대해서도 그 자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어려운 길로는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지름길만 지나려 합니다. 그리하여 <주역(周易)>에는 다만 <주역사전(周易四箋)>만을 알고 <서경(書經)>에는 다만 <매씨서평(梅氏書平)>만을 아는데, 다른 것도 다 그런 식입니다. 대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것은 비록 천지를 놀라게 하고(驚天動地) 만고에 처음 나온(萬古初出) 학설이라 할지라도 모두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자연히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므로 깊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는 비유컨대 귀한 집 자제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기름진 음식에 배부른지라 꿩이나 곰의 발바닥으로 요리한 것이라도 보통음식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주역사전>은 <주역>에 관해 다산이 쓴 저작이고, <매씨서평>은 <서경>에 관해 다산이 쓴 저작이다. 원서는 안 읽고 얄팍하게 해설서만 읽는다는 뜻이겠다. 학문을 하는 데에는 멀고 험한 길을 마다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쉬이 얻은 것은 그 소중함을 잘 모르고 쉬이 잃기 마련이다.
“걸인이나 배고픈 사람이 허겁지겁 먹을 것을 찾는, 마치 목마른 말이 기운차게 냇가로 달려가는 듯한 기상(渴馬奔川의 氣象)이 없습니다.”
이른바 ‘헝그리 정신’이 없음을 질타한 것이다. 무릇 학문이란, 독수리가 먹이를 찾아 대들듯 목마른 말이 물을 찾듯 목표의식이나 갈구(渴求)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왜 학문을 하는지부터 자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목표의식이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학문에 성취가 있으려면 투지와 갈구(渴求)가 필요하다. 학문 자체를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모르되, 공부하는 사람은 새겨보자, 지맹활적(鷙猛猾賊)과 갈마분천(渴馬奔川)의 기상(氣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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