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오리이야기

문근영 2009. 10. 19. 20:22





오리이야기

세월에 어떤 금이나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시간관념으로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나온 한 해는 우리 모두에게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크게 흔들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끔찍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 그런 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이 어렵게 돌아가다 보니 맑고 향기롭게 모임에서도 예상 밖의 일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서울 모임에서는 날마다 2백명에 가까운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나누어주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이 일에는 보문선원과 그곳 불자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활동이 밑받침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료급식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집안살림 꾸려가기에도 빠듯하고 어려운 때에, 거르지 않고 꾸준히 성금을 보내주신 전국 각지의 회원들 한 분, 한 분께도 이 기회에 진심으로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맑고 향기로운 그 마음이 이웃에 나누어지면서 세상은 조금씩 좋아져가리라 믿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에게 우리 마음을 나누어 줄 때, 우리들 안에 있는 자비의 씨앗이 한 꺼풀씩 움트게 된다는 도리를 아시는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일찍이 누구에게선가 입은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일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씨앗이 움트게 된다는 점에 보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는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 보리심(깨달음의 지혜)을 발하고, 보리심으로 인해 마침내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면서 경전은 이런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넓은 벌판에 서 있는 나무의 뿌리가 수분을 받으면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무성해지듯이 생사광야의 보리수도 그와 같다. 모든 중생(우리 이웃)이 뿌리라면 부처와 보살은 꽃과 열매다.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지혜의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자비심으로 돕게 되면 그 공덕으로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에, 보리심은 근원적으로 이웃에게 딸린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이웃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할 일이 있고, 우리 삶을 보다 값지게 가꾸어나갈 수 있다는 출세간적인 논리입니다.

해가 바뀌면 삶의 양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새해를 맞으려면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변함이 없는 똑같은 되풀이는 무료하고 따분합니다.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 냅니다. 새해에 복 받으셔서 맑고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최근에 나는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내 오두막에는 나무로 깎아놓은 목이 긴 오리가 한 마리 있어, 말벗이 되고 있다고 언젠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시장 골목을 지나다가 나무로 만든 병아리만한 새끼오리를 보고, 우리 오리와 함께 지내도록 했으면 어떨까 싶어 그걸 사왔습니다.

어미오리 곁에 새끼오리를 요모조모로 그 자리를 잡아주면서 사이좋게 잘 지내보라고 일렀습니다. 내가 집을 비우고 나가면 혼자서 지내기가 적적할 것 같아서, 말하자면 양자를 하나 들여 준 셈입니다. 첫날은 내 눈에도 정다워 보이고 혼자서 달랑 있을 때보다 호젓하지 않아 잘 데리고 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나자 두 오리 사이가 어쩐지 부자연해 보였습니다. 새끼오리는 아직 철이 들지 않아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겠지만, 어미오리는 새로 들여온 양자를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어린 것이라 적막한 산중에 살기는 적합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새끼오리를 다시 산 아래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 그랬더니, 우리 오리는 그전처럼 홀로 있을 때의 그 침묵과 고요, 그리고 홀가분함과 의젓함이 되살아났습니다. 나는 이 일을 통해서 산중에서 홀로 사는 의미와 모습을 거듭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지난 12월 19일 길상사에서 '맑고 향기로운 음악회'를 마치고, 밤이 늦었으니 자고 가라는 둘레의 권유를 물리치고 내 오두막으로 한밤중 자정이 지나 돌아온 것은, 물론 내 삶의 질서이기도 하지만 깜깜한 산중에서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오리를 생각해서였습니다.

내가 도시 절인 그곳에서 묵게 되면 우선은 여러 가지로 편리할 것입니다. 날마다 한 차례씩 군불을 지필 일도 없고, 두꺼운 얼음장을 깨고 물 긷는 수고도 없을 것이며, 때가 되어 먹는 팍팍하고 의무적인 식사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온 산을 차지하고 지낼 때의 팔팔한 그 기상과 활기는 이내 꺾이고 말 것입니다. 편리한 가전제품들에 다시 길들이게 되면 소시민적인 나약함에 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끼오리를 거느렸던 부자연한 그 어미오리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다고 해서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뜻을 같이 할 때 비록 천리 밖에 떨어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함께 있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가시적인 그 시간과 공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 法頂 스님의 수상집'무소유'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