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무소유 2 나의 취미는

문근영 2009. 4. 16. 07:45

법정스님의 모습

나의 취미는


취미는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선택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누구도 무어라 탓할 수 없다. 남들이 보기에는 저런 짓을 뭣하러 할까 싶지만, 당사자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성을 지니게 된다. 그 절대성이 때로는 맹목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낭비적이요 퇴폐적인 일까지도 취미라는 이름 아래 버젓이 행해지는 수가 있다.

굵직굵직한 자리가 바뀔 때마다 소개되는 면면面面들의 취미를 보면 하나같이 "골프"라고 한다. 언제부터 이 양반들이 이렇게들 "골프"만을 좋아하게 됐을까 싶을 정도다. 우리 같은 현대 속의 미개인은 그 "골프"라는 걸 아직 구경조차 못해 보았지만 그게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아이젠하워 같은 양반도, 만약 이 게임이 없었다면 나는 도대체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시원스레 다듬어진 드넓은 초원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친밀한 사람들과 즐기는 동작은 상상만으로도 상쾌할 것 같다. 이런 일로 해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고 다음 일을 보다 탄력있게 수행할 수도 있으리라. 구경꾼들은 한낱 싱거운 장난처럼 볼지 모르지만 거기에 열중한 풀레이어들에겐 그야말로 "골프"일 것이다.

이와 같이 좋기만한 "골프"가 아직도 우리에게 저항감을 주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없는 특수 계층만의 취미요 오락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용되는 연장들은 모두가 값비싼 외제다. 그러니 외화를 주고 들여온 것이다. 그리고 "골프" 클럽에 가입하는 데는 보통 월급쟁이로서는 명함도 못 내밀 고액이 든단다. 또한 골프는 초원에서만 끝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한때 항간에 떠돌던 정치와 사업은 집무실에서가 아니라 대개 "골프"를 통해서 익는다는 풍문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닐 듯싶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취미다운 취미라면 우선 자기 분수에 알맞는 일이어야 한다. 자기 처지로서는 도저히 같이 어울릴 수 없는데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섞인다거나, 모처럼의 주말을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은데 상사의 시야를 의식하고 끌려가는 일이 있다면, 드넓은 초원과 맑은 공기도 그들에게는 오히려 공해임이 분명하다.

"골프는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칼비니스트들이 창조해 낸 전염병"이라고 한 말을 상기해 봄직하다.

오늘 우리 현실은 개인의 기본권이라 할지라도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가차없이 유보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수 계층만이 즐기는 취미는 사회적 계층 의식을 심화시켜 마침내 국력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현상은 이른바 유신 이념에 부합될 수 없을 것이다. 바람직한 취미라면 나만이 즐기기보다 고결한 인품을 키우고 생의 의미를 깊게 하여,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