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마음나누기블러그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1990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1990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
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
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
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
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
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
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침향(沈香)
잠시 잊는 것이다
生에 대한 감동을 너무 헐값에 산 죄
너무 헐값에 팔아버린 죄,
황홀한 순간은 언제나 마약이라는 거
잠시 잊은 것이다
저 깊고 깊은 바다 속에도 가을이 있어
가을 조기의 달디단 맛이 유별나듯
오래 견딘다는 것은 얼마나 달디단 맛인가
불면의 香인가
잠시 잊을 뻔했다
白檀香이,
지상의 모든 이별이 그러하다는 것을
깊고 깊은 곳에 숨어 사는
沈香을,
토하젓
내 청구릿빛 알몸이
아유타의 눈물에 젖어
도성 밖 어느 부뚜막에서 뜨겁게
사흘 낮밤 그렇게
눈도 귀도 우리들 쓰라린 사랑도
붉게 붉게 문드러져서는
오직 그대의 혀끝에만 스미는
맛,
치사량의 독, 그리고
지독한 꿈의 냄새에 취해버린 몇 년
夢死할 수 없어 깨어난다
누운 채로 밤새워 걷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
그 길에서 만난 세월
이름 모를 분홍색 꽃잎 사이사이
검은 나비가 꽃잎을 빨고 있다
내 몸 가득한 꿈의 냄새가 빠져나간다
한 아비의 마당에
한 어미의 옷섶에 뚝 신문 떨어지는 소리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송이들
너희가 우리를 취하게 했구나
삶은 때로 진부해서 살 만하고
꿈은 때로 지독한 제 몸 냄새로 죽음을 밀어낸다
허약한 일상들은
꿈의 갈비뼈 사이에서 잠이 들고
초 분 시간을 따라 송이송이 꽃이 된다
누군가의 미숙한 사랑이 되고
지상의 하루가 되고 前生이 되고 全생애가 된다
치사량의 毒, 그리고
고해성사
기도했다 날마다
겨울 산벼랑에 걸린 목숨
어쩌다 한번 지은 죄
저문 또랑에서 성당 구석에서
너와 나의 기억에서 희게 빨려지기를
의무인 양 거듭되는 죄 끌고 다니는
어떤 한 사람을 본다 무척
닮았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러면서 내일은 깨끗해질 거라며
어쩐지 안쓰러운 오,
누구에게 돌 던지라 나는
또 누구의 하루에 뾰쪽이 서 있는
바늘 끝이 되었으랴
아무래도 잔인한 핏줄이었나보다고
투덜투덜 조상 탓을 하면서
악몽을 염려했다 오늘 밤의
어수선할 일기장의 내용들을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