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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반칠환

문근영 2008. 11. 12. 11:32

 

사진/항상푸른나무처럼 블러그에서

 

어머니 5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 다니던 산지기 아내

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 바라보신다

칠십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

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

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

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

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

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

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

 

 

가뭄                                                     


저 소리 없는 불꽃 좀 보아.

감열지처럼 검게 타오르는 들판,

그 위로 날던 새 한 마리

한 점 마침표로 추락한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갈 수 없는 그곳                                       

- 1992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렇지요,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상의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다는 그곳은 도대체 얼마나 험준한 것이겠

습니까. 

 새벽이 되기 전 모두 여장을 꾸립니다.

 탈것이 발달된 지금 혹은 자가용으로, 전세 버스로, 더러는 자가 헬기로,

 여유치 못한 사람들 도보로 나섭니다.

 우는 아이 볼기 때리며 병든 부모 손수레에 싣고 길 떠나는 사람들,

 오기도 많이 왔지만 아직 그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는 도복을 입은 도사들 그곳에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팔아 돈을 벌기

도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기 보다 더 어렵다는 그곳,

 그러나 바늘귀도 오랜 세월 삭아 부러지고 굳이 더이상 통과할 바늘귀도

없이 자가용을 가진 많은 사람들, 벌써 그곳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

다.

 건너가야 할 육교나 지하도도 없는 곳, 도보자들이 몰려 있는 횡단보도에

연이은 차량,

 그들에게 그곳으로 가는 신호등은 언제나 빨간불입니다.

 오랜 기간 지친 사람들,

 무단 횡단을 하다가 즉심에 넘어가거나 허리를 치어 넘어지곤 합니다.

 갈 수 없는 그곳, 그러나 모두 떠나면 누가 이곳에 남아 씨 뿌리고 곡식을

거둡니까.

 아름다운 사람들, 하나 둘 돌아옵니다.

 모두 떠나고 나니 내가 살던 이곳이야말로 그리도 가고 싶어하던 그곳인

줄을 아아 당신도 아시나요.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속도에 관한 명상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

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

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누나야                                                   


다섯살 어린 동생을 업고 마실갔다가

땀뻘뻘흘리며 비탈길 산지기 오두막 찾아오던 참대처럼 야무진,

그러나 나와 더불어 산지기 딸인 누나야

국민학교 때

'코스모스 꽃잎에 톱날 박혀 있네

톱질하시던 아버지 모습 아련히 떠오르네'

동시를 지어 백일장에 장원한 누나야

나이팅게일이 되겠다고, 백의 천사가 되겠다고

간호대학에 간 누나야

졸업한 다음 시내 병원 다 뿌리치고 오지마을

무의촌 진료소장이 된 누나야

부임 첫날 다급한 소식 듣고 찾아간 곳 다름아닌

냄새 나는 축사, 난산의 돼지 몸 푸는 날이었다고

다섯 마린지 여섯 마린지 돼지 새끼 받아내느라

혼났다던 스물두 살 누나야

못난 동생 시인 됐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머리 쓰다듬던 누나야

병든 엄마 병들었다고 누구보다 먼저 친정 달려와

링거병 꽂고 가는 양념딸 누나야

이제 곧 큰 길이 나고 사라진다는 고향마을 중고개에

아직도 나를 업고 가느라 깍지 낀 손에

파란 힘줄 돋는 누나야

세상의 모든 누나들을 따뜻한 별로 만든

나의 누나야

 

 

 

 

목격                                                      

- 속도에 관한 명상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물결                                                      

 

 그랬구나! 가슴의 통증이 가시고 눈앞이 환해진다. 어리석고 아둔한 것처

럼 보이던 사람들의 굽은 어깨와 허리가 매화 등걸처럼 휘영청 내걸리고 가

슴마다 꽃이 핀다.


 내 눈의 들보와 남의 눈의 티끌마저 모두 꽃핀다.


 가장 아프고, 가장 못난 곳에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 걸려 있다니, 가슴

에 박힌 대못은 상처인가 훈장인가?


 언제나 벗어던지고, 달아나고 싶은 통증과 치욕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으

며, 가슴 속 잉걸불에 묻어둔 뜨거운 열망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을 것인

가?


 봄날 새순은 제 가슴을 찢고 나와 피며, 손가락 잘린 솔가지는 관솔이 되

고, 샘물은 바위의 상처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여, 내 근심이 키우는 것이 진주였구나, 네 통증이 피

우는 것이 꽃잎이었구나.


 

 

 

바퀴                                                     
- 속도에 관한 명상 5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

 

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어떤 채용 통보                                        

 

아무도 거들떠보도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뼈 두개 발목뼈 두 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넣어 

꽃씨 하나 묻어들고 가겠습니다 

 

 

 

 

어린이날                                                


공군 3579부대 기동타격대 반 방위병, 무사히 기지 방어

야간 근무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어, 풍년

전기밥솥 열어 김치에 밥 한 술 혼자 뜨는데, TV 채널을

돌리니 '오월은 푸르구나 - 우리들은 자란다아 -.'

이쪽으로 돌려도, 저쪽으로 돌려도, '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 '에이 재미없어.'

ON/OFF 스위치를 픽 눌러 끄는데,

'우리 막내둥이 오셨나?'

삽짝문 열고 칠순 노모가 들어오시네.

'마실 다녀오셔유?'

'아니다. 아침에 테리비를 보니까 오늘이 어린이날 아니냐.

우리 막내 뭘 슨물할까 하다가 막걸리 한 병 받아오는 질이다.'

'야? 막걸리를?'

어머니, 빙긋 웃으며 빈 스뎅 그릇을 내미신다.

 

 

언제나 지는 내기                                     

 

소나무는 바늘쌈질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 수건 한 장을 다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구슬을 한 가지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 여름 없이 달이 뜬다 

 

 

 

 

웃음의 힘                                               

                        
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은행나무 부부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한 걸음                                                 
-속도에 대한 명상 11

 

드물게 나무 아래 내려온 늘보가

땅이 꺼질세라 뒷발을 들어 앞으로 떼놓는다

나뭇잎에 앉아 있던 자벌레가 활처럼 굽은 허릴 펴

삐죽 앞으로 나앉는다

맹수에 쫓긴 토끼가 깡총 뛰어오른다

버섯조각을 입에 문 개미가 쏜살같이 내닫는다

첫돌 지난 아기가 뒤뚱거린다

보폭은 다르지만 모두 한 걸음이다

 

 

 

 

호두나무                                               


쭈글쭈글 탱글탱글

한 손에 두 개가 다 잡히네?

수줍은 새댁이 양볼에 불을 지핀다

호도과자는 정말 호도를 빼닮았다

호도나무 가로수 下 칠십년 기찻길

칙칙폭폭, 덜렁덜렁

호도과자 먹다보면 먼 길도 가까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