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동공 / 박주택(2005년 제20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 한다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
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
꽃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없는
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
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
받아들이는 발자욱, 가는 핏줄 속으로 잦아드는
금잔화, 생이 길쭉길쭉하게 자라 있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때때로 우리들은 자신 안에 너무 많은 자신을 가두고
북적거리고 있는 자신 때문에 잠이 휘다니,
기억의 풍금 소리도 얇은 무늬의 떫은 목청도
저문 잔등에 서리는 소금기에 낯이 뜨겁다니,
갈기털을 휘날리며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꽃들이 허리에서 긴 혁대를 끌어 바람의 등을 후려칠 때
그 숨결에 일어서는 자정의 달
곧이어 어디선가 제집을 찾아가는 개 한 마리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을 토하며
어스렁어스렁 떫은 잠 속을 걸어 들어간다
木蓮 / 박주택
어둠을 밀어내려고, 전생애로 쓰는 유서처럼
목련은 깨어 있는 별빛 아래서 마음을 털어놓는다
저 목련은 그래서, 떨어지기 쉬운 목을 가까스로 세우고
희디흰 몸짓으로 새벽의 정원, 어둠 속에서
아직 덜 쓴 채 남아 있는 시간의 눈을 바라본다
그 눈으로부터 헤쳐 나오는 꽃잎들이
겨울의 폭설을 견딘 것이라면, 더욱 더 잔인한 편지가
될 것이니 개봉도 하기 전 너의 편지는
뚝뚝 혀들로 흥건하리라, 말이 광야를 건너고
또한 사막의 모래를 헤치며 마음이 우울(憂鬱)로부터
용서를 구할 때 너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말똥거리다 힘이 뚝 떨어지고 나면
맹인견처럼 나는 이상하고도 빗겨간 너의 그늘 아래에서
복부를 찌르는 자취와 앞으로 씌어질 유서를 펼쳐
네가 마지막으로 뱉아 낸 말을 옮겨 적는다
잠/박 주 택
사닥다리가 내려오는데 눈이 부셨다
십 년을 가까이 산 집엔, 잠으로 가득찼는데
숨기둥 밖에서 잠이 담뱃내가 밴 벽지와 비애를 이기고
긴긴 지옥의 창고를 부수어버렸다, 지붕에는 다시
망초꽃이 피고 밤에는 자작나무 가지들이
지쳐 있는 창문을 향해 바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가장 깊은 잠이 이 세상에는 있어
죽음조차도 몸을 빼앗긴다, 서해까지, 무덤까지
윙윙거리며 고요히 길을 내며 비자나무숲을 만든다
저 깊은 마음에서 뛰쳐나와 기쁨의 꿈을 꾸며
구름의 서식지에 가서 지식으로 구름의 파수꾼이
되는 창문들, 강의 목숨을 끊고 바닥을 기어
하구로 몰려가는 모래들처럼 서걱거리며 흩어진다
보라! 내려온다, 금빛, 허무의, 햇빛이 달디단 열매를 달고
중천中天에서, 기도하는 망초꽃 뒤에 숨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붕 위로 고요하게 내려앉는다
무인도/박주택
우리가 서로에게 젖다 다시 홀로 스스로의 길로
걸어 돌아갈 때 언뜻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삐꺽거리는 외로움을 마음에 새겨두라
그 외로움의 성분에 곰팡이가 끼고 누룩 뜰 때쯤
어느 멀리서는 이기지 못하는 괴로움으로 횃불을 피우고
더 먼곳에서는 유해들이 배를 깔고 탄식하는 소리로
적막하기 그지없는 밤을 채우기도 하니까
바깥에서, 높은 곳에서, 운명이 비웃으며
우리들에게 약속의 증서를 써주었던 손으로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창문으로부터는 봄에 머물렀던
나뭇가지들이 기어올라온다. 어리석게도
껍질이 벗겨지는 곳에서 강이 태어나고
기념비적인 죽음도 생겨나리라, 서서히 묘역에서는
사랑했지만 이별한 사람이 먹다 남은 빵이 노래에 싸여
굳어지는 것을 본다
굴 / 박주택
저 굴은 굴이 아니다
시금치와 콩나물, 김치와 멸치와 함께 놓인 저 굴은
바다로 흘러간 검은 물에 거품을 물다
죽은 채로 건져진 석화石花다, 그도 아니면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 때
아가리를 크게 벌려 해와 달을 잡아먹고는 다시 토한다는
불개다, 불개여서 검은 물을 독으로 만들어 일가족을
죽여 놓았지 않았겠는가? 볶지만 않았다면 저 시금치도
저 콩나물도 식당 밖 가로수처럼 배가 독을 품을 채
터질 듯이 부풀어 있을 것이다, 탱탱한 옷과 물고기
탱탱한 머리카락과 두드러기, 벼가 누렇게 여물어 가는 날
장지葬地 갈 대 길가 함부로 핀 꽃들은 제 몸의 기둥들을
바로 세우고 있었다 빛이 비스듬히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는 동안 스승은 관 속에 누워
흐린 국수로 실려 나가는 가시연꽃을 보았을까?
가시연꽃 보러 물 위에 핀 가시연꽃 보러
썩은 저수지물 위에 아름다이 핀 가시연꽃 보러 가던 날처럼
알 수 없는 오기를 저장한 채 입을 앙다문
굴의 검은 점들을 바라볼 때 식당 창틀에 더께진 매연이
두껍게 생을 가장하고 있는 것처럼
굴도 무엇에 매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 /박주택
이 거리, 노래가 되다만 빛들이
갈 곳을 잠시 잃어 가야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과 섞인다
천천히 길들 나무들의 눈빛에 힘입어 길게 뻗어 있음을
자랑한다, 길을 노래하는 자 불행했다
기적을 기대하는 자 나무 그늘 아래 잎사귀에 덮이고
무엇이 되고 싶었던 자 모자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자신의 차례에도 입을 다문다, 저녁 눈 내리고
함부로 어깨를 부딪는 저녁 눈 내리고 이제 더 없이
자신을 불러 줄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어느덧 이것이 생의 하루가 아니라
생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길은 구부러진다, 이제 어디론가 향해 걸어가는 것은
길이 시작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다시 돌아가는 그 길로 걸어갈수록
자신이 가야할 곳과 가까워졌음도 깨닫는다
저녁의 함박눈 내리고 헤매임 가운데 만난
빛 하나 호흡을 불어 만든 눈빛을
물 위에 풀어 놓는다
하늘로 가는 단칸방/박주택
방이 있다 그 방은 물에 젖어
시간에 떠 있다
늙은 어머니가 중풍으로 누워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고
삼십년을 넘게 건사해 온 장애 아들은
못에 노끈을 매고 있다
말 못하는 어머니, 사지를 뒤틀며
의자 위에 선 아들을 올려다본다
툭! 의자가 굴러가고
노끈에 목을 맨 아들이 컥컥거릴 때
그 온몸으로 쥐어짠 눈물의 힘으로
단칸방 하늘로 올라간다
고요한 나라의 억센 읍내 / 박주택
나의 살던 고향의 읍내엔
전자 대리점의 쇼윈도에
튀긴 진흙이 말라 파리똥처럼 붙어 있지
소읍의 사람들 휴일이며
승용차를 타고 바다로 놀러 나가고
구수하던 사투리도 이제는 쓰질 않지
어제는 삼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여
한 명이 칼에 찔려 죽었고
그 피가 먼지에 덮인 채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네
노래방을 차렸던 외지 사람
그곳의 텃세에 밀려 문을 닫았다지
역으로 가는 길 옆으로는
여관과 다방들이 억세게 버티어 있고
다시 그 길 옆으로
살아, 다시는 덤빌 수 없을 것같이 생긴
튼튼한 가옥들
그 가옥들 사이의 어떤 집에
젊은이의 어머니가 매일 새벽기도에 나가
젊은이의 억셈을 빌고
그 가옥들 사이 어떤 집에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끄떡없는 강단을 위해 개를 잡는다
저녁뉴스 / 박주택
그는 말할 것이다. 아침에 허겁지겁 출근을 하고
지각에 심장을 태우다가 그는 말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점심의 부드러운 야채에 감정을 풀고
괜찮다. 더욱더 많은 밥풀들이 일어선다.
그는 굳은 어조를 풀고 책상 위의 책을 정리한다.
저 진지한 표정의 축조물. 非詩的인 사무실.
차가 전자음을 내며 부딪쳤다.
그것들은 원래 정사각형이었다. 어젯밤.
바퀴벌레가 탁자 틈을 빠져나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격했다.
오후는 점점 차가워져 갔다.
꽉 찬 술집에 존재했을 담배꽁초들. 깨어나라. 닫힌, 더 많은.
사무실을 빠져나온 그가 칼을 앞세운
많은 족속들을 지나쳤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늦었다.
그는 새로 사 입은 양복이 몸에 맞지 않았다.
과연 오늘도 새로운 뉴스가 시작되었다.
거기다가 정국은 아주 불안했다.
뉴스 속으로 걸어간다. 그는 뉴스를 진행했다.
시간의 육체에는 벌레가 산다 / 박주택
트럭 행상에게 오징어 10마리를 사서
내장을 빼내 다듬었다. 빼낸 내장을 복도의 쓰레기 봉투에
담아 한 켠에 치워 두었다. 이튿날 여름빛이
침묵하는 봉투 속으로 들어가 핏기 없는 육체와 섞이는 동안
오징어 내장들은 냄새로 항거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장마가 져 나는 지붕 위에 망각을 내리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헛된 녹음에 방문을 걸고 있을 때
살 썩는 냄새만이 문틈을 타고 스며들고 있었다
복도에는 고약한 냄새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방 안 가득 풍겨오는 냄새를 맡으며 냄새에도 어떤 갈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더 정확히는 더러운 쓰레기를 힘겹게 내다
버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과 싸우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복도의 문을 열었다
비가 멎고, 싸우고 난 뒤의 불안한 평온이
사방에 퍼져 있었다. 공기가 젖은 어깨를 말리고 있었다
발자국에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막 열쇠로 지옥 같은 문을 잠그고 돌아설 때쯤
핏기 없는 냄새가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무덤에서 냄새의 뿌리로 태어난 수많은 구더기들이
시간의 육체 속으로 흩어져 갔다
*제5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
장수하늘소를 찾아서 / 박주택
노인은 의자에 앉아 붐비는 전철을 기다린다
지팡이를 세우고 낭패한 세월의 익사한 꿈들을
발로 비벼본다, 그는 그래서 외롭다
모자를 집어들고 전철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그의 오랜 적막을 섞는다, 유령처럼 흐물거리는
그의 몸 속으로 삶의 잔뿌리가 뻗쳐온다
그는 비누 냄새가 나는 여자의 엉덩이에
몸을 붙인다, 발밑에 바위가 깨져 쌓이고
살을 뜯는 냄새를 풍길 때
독말즙 퍼지듯 무엇인가 그의 배꼽으로부터
짜르르 올라가며 그를, 생애의 중심에 세운다
그가, 시간의 즙을 짜 만든 붐벼오는 꿈에 눈을 감는다
정육점 / 박주택
완벽한 육체를 이루었던 소는 칼에 찢겨
피에 젖은 갈고리에 걸려 있다, 가끔씩 날파리들이
핏물을 빨다 냉동고 위로 날아가버리면
몸에서 쫒겨나간 영혼만이 갈고리 주위를 맴돈다
바닥에 핏물을 떨어뜨리는 기억의 몸뚱이
마치 남은 말이라도 쥐어짜듯 팽팽한 얼룩들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거푸 숨을 몰아 내쉬며
한 방울의 핏빛 눈물을 짜낸다
진열대 속 자동 분쇄기에 가지런히 썰려 있는
살점들, 한 그루 시간의 붉은 잎사귀처럼 서로 몸을
포갠 채 지독한 적막 속에 끼어들 때
일생을 캐묻듯이 깃털들이 펄럭인다
게으른 책임을 두 눈 속에 퍼부었을 소
그러나 이제, 시간에게 상속받은 것이 얼룩뿐이라는 듯
붉은 燈을 바닥에 하나둘씩 켜놓는다
황야(荒野)에서 /박주택
움직이는 것들은 다 까닭이 있어
제 그림자를 둘러본다, 너무도 고요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라져 간 것들의 중심에 되돌아오는 음성을 섞는 것을
발자국마다에 비틀거리며 고운 뺨들이 일어선다
이제 저 고운 뺨들은 자신의 숙소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편도선이 부어오른 채
돌아가지 못한 발자국에 견주어 다시금 자신 안으로
발을 디딜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덤벼드는 온갖 것들의 짐승과 싸우며 모자란
지혜를 더듬을 것이다, 용서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은 생이 다 가고 나서야
끝마칠 것임을 안다, 하지만 까닭 없이 고이는
목숨이 푸르고 질긴 것들에 힘을 빼앗겨
더운 정의로도 달래지 못할 때 것들로도
자신이 설 땅이 없는 자리에서
자신이 자신을 눈감아줄 때까지
저처럼 움직이는 것들에
숨을 비비기도 하는 것이리라
배들의 정원/ 박주택
가자고 한다, 밤바다에
낮게 떠 있는 저 별, 마음 밖의
뻘밭에 빛을 비추다 쉭쉭거리는 폭죽에
마른 뺨을 부빈다, 방금 건너편에서
질러온 사람의 목소리 하나
사람의 목에 걸려 파도처럼 부서질 때
폭죽은 자신의 생애가 밤에 있음을 알린 뒤
어둠을 투항한다, 그러면 별은
비로소 자신의 빛이 회복됨에
더 높이 떠오르려 하고 배들은
파란波蘭에 슬쩍슬쩍 뒤척인다
물결이 바다를 이루고
모래가 하늘과 구분되는 동안
사람은 사람 안으로 기어드는
틈을 열어 침묵이 용서가 되는
순간을 알린다, 그리고 가자고
별들이 무늬를 만들 때
가자고, 침묵은 철썩대는 저
파도에 이정표를 세운다
문(門) / 박주택
나는 나를 떠나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내가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나를 들이마신 사람들의 위장 속에서
돌아갈 길이 너무 멀어 주저앉아버린 사람들처럼
나에게로 내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느리게 걸어오는 꽃과
가느다란 나의 목소리를 달빛에게 던지며
발을 옮기는 눈앞의 것들을 외면한다
문의 중심에 별들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들을 하나씩 지상에 내리고
나를 향해 몰려드는 수많은 내가
畢生을 거는 푸른빛에 시비를 걸 때
저 낮은 곳으로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더욱
잔인해지고 기억의 음성만이 시간의 너머에서
푸석하게 들려올 때
나는 나무가 꽃을 살피는 틈을 타
빛이 밴 창문을 열어젖히며 수많은 내가 싸늘하게
시간 속에 능멸을 퍼뜨리는 것을 본다
손가락들이 흩어져 굳어가는 것을 본다
서해西海
/ 박주택멀어져 가는 발자국은 제 곳으로 돌아가는 발자국이다
저녁에는 생선을 먹으리라,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껍질을
먹으며 작은 방에서 새벽이 다 할 때까지
내게도 쉴 곳이 있었음을 말하리라
나무 둘레로 퍼져 공터의 의자들을 들석거리게 만드는
귀에 익은 노래 온 힘을 다해 방파제를 향해 걸어갈 때
노래의 출생지인 별 자욱이 기적을 향해 걸어간다
먼 저편에서 잎사귀들을 반짝이며 바람들 진격해온다
망각을 향해 열린 포구
다다를 곳이 내게라도 있는 듯
기억으로 들이치는 물결이 문을 두드린다
파도를 거쳐 온 배들 항생제를 먹는 새벽
작은 방의 의자에 앉아 어깨에 내려 앉는 불빛을 받는다
그리운 것들에 기대어
먼 바다에서 우는 돌고래 소리 듣는다
바람을 건너는 법/박주택
시종 바람이 물결쳐 오고
귀가 떫은 밖이 몸 둘 바를 몰라할 때
마음으로 깊이 들어가 비 내리는 새벽에 머물자, 어둠이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날, 공허한 불빛은 시작의
노래에 헛배가 불러 어둠에 단맛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
자정 너머, 이슥한 밤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편지를 쓸 때
안에 깃들어 있던 것들이 미적미적 깨어나 새벽 비에 몸을
맡긴다, 사과 꽃잎이 흩날리는 마음의 방
水仙의 그림자가 곰곰이 번지고 어둠에 보태는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霧笛 소리에 귀 기울이면
길의 한가운데가 건너온다, 안으로 어둠이 청하는 악수에
부슬부슬 파초 잎은 푸르러 쓸쓸한 목숨에 잇대고
물의 싹트는 소리는 강둑에 서서,
단맛 든 어둠을 빨아먹으며 벼른다
새벽의 고운 비는 내리고 안이 궁금한 밖이 허리를 곧추세워
마음을 들여다보는 동안
빗소리에 귀를 가다듬으며
물관을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山竹들
적막/박주택
적막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제 속에 동심원을 그리며 얼핏 멈춰 있을 따름이다
잠시 어금니 꽉 다물고 있을 뿐인 적막
속을 뒤집으면 간이 녹아
거머리처럼 피가 흥건히 고여 있다
지금은 다만 피를 보고 싶지
않은 거다 더는 피가 싫어
눈감고 있는 거다 수류탄의 마음을 하고
언뜻언뜻 숨죽이고 있는 적막
적막은 누군가 다가와 안전핀 뽑아 세상 향해 집어던지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가 되면 다시 입 열어
시끄럽게 떠들어대고야 할 적막
한꺼번에 폭탄 터뜨리고야 말 적막
오늘은 그냥 끙하니 어금니 깨물고 싶은 것이다
고개 돌려 벅찬 가슴 다잡고 있는 것이다
한없이, 반짝이는 / 박주택
별을 노래하는 자를 보았는가
휘파람 시를 쓰며 별에게 두런두런 말을 거는 자
잠에도 들지 않고 반짝, 우리들 머리 위로
빛을 보내는 착한 별에게 꾸벅, 모자를 벗고
인사를 나누는 자, 보았는가
전철역이나 까페를 나서다
서린 입김으로 별에게 길을 묻는 자
누가 별을 노래하던가 별의 손을, 누가
잡으려 뻗던가, 우리들 지붕 위의 별
한사코 빛이 되어 그윽할 때
풀싹이 돋던 옷마다 후두득거리던 별빛
그 맑던 물고기의 비늘을 보며
울컥, 그리움에 손수건을 꺼내는 자, 보았는가?
그 수많은 영혼들은 지금, 어디서
소리죽여 칼을 갈고 있는가!
주름들/ 박주택
저 혼자 가는 길에 빛들은
그림자 곁으로 모이고
생의 것들이 속인 잠들만이
자정을 넘는다, 또한 구두 한 켤레로
남은 사내는 마지막 담뱃불로
그의 치열함을 지운다, 이것이
우리를 둘러싼 것이라면
바람의 입에 재갈을 물리리라
목구멍으로부터 혹은 폐로부터
울려 올라오는 잔뿌리들은
의자며 계단이며 간판을 움켜잡은 채
저녁에 웅웅거리고 있다
산 것들만이 죽은 것들이 두려워
불을 켜는 밤 또 누군가는
옥상에 올라 아득한 추락의 깊이에
앙상한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