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려가는 나무
나 희 덕
풀어헤친 머리가 땅에 닿을락 말락 한다
또다른 生에 이식되기 위해
실려가는 나무,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입술을 달싹여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언어의 도기가 조금은 들어간 얼굴이다
오래 서 있었던 몸에서는
자꾸만 신음소리 같은 게 흘러나오고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걸 받아적으며 따라가다가
출근길을 놓치고 낯선 길가에 부려진 나는
나무를 심는 인부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
나도 모르게 그 나무를 따라간 것은
덜컹덜컹 어디론가 실려가면서
언어의 도끼에 다쳐본 일이 있기 때문일까
어떤 둔탁한 날이 스쳐간 자국,
입술을 달싹이던 그 말들을 다시 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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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 나희덕
석류 몇 알을 두고도 열 엄두를 못 내었다
뒤늦게 석류를 쪼갠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門처럼
앙다문 이빨로 꽉 찬,
핏빛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네 마음과도 같은
석류를
그 굳은 껍질을 벗기며
나는 보이지 않는 너를 향해 중얼거린다
입을 열어봐
내 입속의 말을 줄게
새의 혀처럼 보이지 않는 말을
그러니 입을 열어봐
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이
내 혀를 적시도록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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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동의 上部 / 나희덕
나는 어제의 풍경을 꺼내 다시 씹기 시작한다
6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아서
앞비탈에 자라는 벽오동을 잘 볼 수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오동꽃 사이로 벌들이 들락거리더니
벽오동의 풍경은 이미 단물이 많이 빠졌다
꽃이 나무를 버린 것인지 나무가
꽃을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꽃을 잃고 난 직후의 벽오동의 표정을
이렇게 지켜보는 것도 또 다른 발견이다
꽃이 마악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일곱살 계집애의 젖망울 같은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풍경을 매일 꼭꼭 씹어서 키우고 있다
누구도 꽃을 잃고 완고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6층에 와서 벽오동의 上部를 보며 배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칠고 딱딱한 열매도
저토록 환하고 부드러운 금빛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이미 씨방이 닫혀버린 벽오동의 열매 사이로
말벌 몇 마리가 찾아들곤 하는 것도
그 금빛에 이끌려서일 것이다
그러나 저 눈이 어두운 말벌들은 모르리라
캄캄한 씨방 속에 갇힌 꿈들이 어떻게 단단해지는가를
내 어금니에 물린 검은 씨가 어떻게 완고해지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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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병의 물을 갈며 / 나희덕
꽃은 어제보다 더욱 붉기만 한데
물에 잠긴 줄기는 썩어가고 있으니
이게 웬일인가, 같은 물에 몸 담그고도
아래에서는 악취가 자라 무성해지고
위로는 붉은 향기가 천연스레 솟아오르고 있으니
이게 웬일인가
꽃을 아름답다 말하는 나는
꽃이 시들까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물을 갈아주는 나는
산 것들을 살게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들을 바로 눈감게 하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도 조간신문 위에는 십오 세의 소년이
수은 중독으로 실려 나가고
그 기사에 우리는 잠시 놀란 얼굴이 될 뿐
오히려 그 위에 피어난 꽃을 즐기고 있구나
꽃은 꽃대로 피어나고
줄기는 줄기대로 썩어가고 있을 때
그 죽음이 우연이었다고 지나칠 수 있는가
썩어가는 줄기에서 수은 한줌 훔쳐낸다고
꽃은 순결해질 수 있는가
매일 아침 꽃병의 물을 갈아주며
무엇 하나 깨끗하게 씻어줄 수 없는
우리의 노동을 생각한다
살아 있던 줄기들은 그 밑둥이 잘리우고
꺾인 줄기들은 모두 꽃병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본주의의 꽃이 활짝 핀 방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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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은 얼마나 무거운가 / 나희덕
풍선이 터지는 것은 쉬운 일,
그러나 터지기 직전의 풍선은 얼마나 무거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차마 그 부푼 속을 찌를 수가 없고
그냥 두고 지켜보자니
그것이 조금씩 시들어가는 동안에도
나의 절망은 무디어져간다,
한 줄의 고통을 말하는 동안에도
연필이 무디어지듯이.
풍선은 터지기 쉬운 일,
탱탱한 풍선은 얼마나 무거운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에도 그림자가 / 나희덕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 맞으며 앉아있던 그 자리에
사과 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고슬 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 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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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이 멀지 않다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소로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 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 주었다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 오는 날에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런 저녁이 있다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나 희 덕
나비를 신고 오다니
잔칫집인지 초상집인지
문득 둘러앉은 얼굴들 낯설다돌아가려고 하는데
어지럽게 뒤섞인 신발들 속에서
내 신발 찾을 수 없어 두리번거린다
신발 한짝은 보이지 않고
저쪽 유리창에서 날개 다친 나비가
나를 향해 파닥거리고 있다나비를 신고 오다니!
한 발은 나비를 신고
한 발은 땅에 디딘 채
절뚝절뚝 봄길을 날아 걸어왔느니나비야, 나비야,
이 검은 땅 위에 다시 내려와 앉아라내가 너를 신겠다
날개란 신기 위해 있는 것이니
내가 너를 신겠다. 나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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