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2015 《시산맥》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문근영 2018. 10. 23. 03:40

[2015 시산맥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목련의 오차 외 4/ 최연수

 

 

그해, 인구조사는

호흡 가파른 동네를 오르내렸다

 

목련나무 마디 굵은 손이 가리킨 골목

오래거나 갓 핀 송이를 통계 낸 필체가 흐릿한지

가지는 여러 번 센 숫자를 담에 눌러 적었다

 

눈 먼 봉오리들이 발을 헛딛는 높은 지대

샛길은 몰래 짐 가방을 챙겨 내려가고

올라오지 않는 소식을 괄호로 남겨두듯

나무는 숨은 꽃을 암산으로 헤아렸다

 

무료함만 켜놓고 일 나간 집들

익숙한 이름을 들고 다시 골목 칸칸을 두드릴 때면

지붕을 밟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산 번지 빈칸을 채운

고요 한 채와 찢어진 연과 붕붕거리는 꽃의 시종들

눈부신 외출을 마친

인기척 없는 신발을 센 나는 사월 옆에 숫자 2를 적었다

 

마른 젖을 물린 어미개와 마주친 순간 녹슨 고리처럼

표정이 얽혔다 풀어지고

서류철엔 몇 마리 울음이 추가되었다

 

계약직 같은 봄날, 낮과 밤이 다른 오차와 통계

수수료를 떼듯

하얀 방에 들어앉은 목련 촉이 팍, 끊어지고

학점과 맞바꾼 길에선 저걱 저걱 유리 밟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캔디

 

 

하품을 뱉는 한낮에

누가 설탕을 뿌려놓았을까

 

누운 그림자를 따라 정오마저 가지런해지면

노란 포도알이 가물가물 닫힌다

수염에 찔린 비린 햇살이 나비모양으로 흩어진다

 

네 다리를 늘어뜨린 나른한 호흡을

쪽쪽 빨아먹는 바닥

볕은 셀로판지처럼 바스락거리고

지붕에서 옥상으로 건너뛰던 아슬한 착지와

골목을 뒤지던 배고픔이 따스한 손에 다 녹는다

 

오물오물

고양이를 아껴먹는 노파

고요한 하품이 주름진 입 속으로 뛰어든다

 

떠도는 울음을 불러 갈치 한 토막을 굽는 동안

발톱은 안으로 휘어졌다

매끄러운 소리를 무릎담요로 덮고 앉으면

말랑하고 끈적끈적해지는 기류

 

쓰다듬을수록 동그래지는 사탕

침침한 눈과 귀로 녹여먹는 뒷맛이 달다

 

   

 

드므*

 

 

주술이 통하는 곳이 얼굴이라면,

신은 가장 잘 속아 넘어가는 것들로 이목구비를 만들었다

 

어떤 사무친 마음 있는지

물거울 속 또렷한 얼굴이 중얼거리고

내 손가락에 놀란 수피水皮가 재빨리 지문을 찍었다

 

어느 궁에서 본 드므 속엔 밤마다 당황한 불이 있었다

슬며시 다가와 비추는 순간,

말끄러미 올려다봤다는 화마

떠다니는 달에 황급히 얼굴을 벗어 걸어도

푸시시 불은 꺼졌다고 했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제 자신을 꺼버려야만 했을까

놀란 걸음이 서둘러 빠져나가고

잠시 고요한 파문이 남았을 것이다

 

불을 다스리는 건 냉수밖에 없지,

가슴을 끈 아버지에게선 여울목 물소리가 났다

그래도 남은 화기가 있는지

약수 한 통 받아들고 오솔길을 내려가셨다

 

그 밤, 냉장고를 열자

낯익은 손이 방금 다녀갔는지 흔들리다 잦아든 갈증

유리컵으로 옮긴

찰랑이는 거울 속엔 여전히 화끈거리는 내가 있었다

 

 

*넓적하게 생긴 큰 독. 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도망을 간다는 주술적 의미.

 

 

 

우산의 시간

 

 

 

엄마를 따라간 그날, 공장에는 두개의 문이 있었다

 

왼쪽을 열면 정오의 해가,

오른쪽을 열면 구름이 내걸리고

 

심장 쪽을 믿는 엄마가 우측 문을 열자

구름을 숨긴 포자들이 날아들었다

섶다리 밀려온 수상한 기미가 함께 떠다녔다

 

검은 하늘은 자주 무너졌다

손잡이 망가진 우리 집,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만 웃었다

 

꽃무늬 양산을 내던지고 우산공장으로 출근한 엄마

챙 좁은 우산 같은 월급 속으로 뛰어든 우리는

젖은 서로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슬레이트지붕에 대못이 박히는 시간

살이 부러진 여름은 길에 나뒹굴고

구멍 난 하늘이 방 안 양동이 속으로 뛰어내렸다

구름사촌이었던 우리는 퐁, , 리듬에 맞춰 잠이 들었다

 

정오의 해를 찾아 나선 부도난 양산의 계절

먹구름 몰래 펼쳐든 우리들 웃음에서

녹슨 쇳소리가 났다  

 

 

 

프릴의 계절

 

 

음료를 삼키는

건조한 그의 후두가 펌프질을 했다

 

빨대 꽂힌 주스 팩이 홀쭉해졌다

 

 

꽃들이 모두 뛰어내린 허전한 목

바람이 핥는 꽃대가 불안하다

마지막 꽃냄새를 들이켜는 바람의 양볼이 쏙 들어간다

 

프릴은 허전한 목들이 하루를 사는 방식

꽃잎 무성한 계절,

꽃나무들이 몇 겹 주름 속으로 속내를 감춘다

 

변종된 겹 백일홍이 숨긴 뒤편은 수상쩍고

목도리도마뱀의 프릴은 치명적인 무기다

 

지금은 시린 발을 감춘

늙은 연밥이 거꾸로 매달리는 계절

황혼은 거리의 불빛들을 숲으로 끌어오고

목이 허전한 나뭇가지들이 노을 목도리를 칭칭 감는다

 

움츠린 외투 안주머니에 그의 봄날이 있듯

노란 부리를 감싼

숲속 프릴 속에는 숨겨둔 온기가 있다

 

 

 

 

최연수 / 2015시산맥, 영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누에, 섶을 뜨겁게 껴안다평론집이 시인을 조명한다.

 

 

 

 

 

 

 

 

 

<심사평> 선명한 시상(詩想)과 참신한 시적 상상력

  
  제10회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작품은 총 60인의 653편이었다. 심사는 응모자명을 배제하고 3명의 심사위원이 예심의 과정 없이 모두 돌려 읽은 후 각자의 점수를 매기고 가장 높은 총점을 받은 5인의 응모자를 본심에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차 선택된 작품은 최연수 「목련의 오차」 외 9편, 정선우 「타클라마칸」 외 11편, 안은주 「저울」 외 9편, 김용상 「경칩」 외 10편, 고은수 「아침」 외 9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다시 이들 작품을 숙독한 후 각자의 평가를 제시하며 최종선정자를 좁혀나갔다. 오랜 논의 끝에 최연수의 「목련의 오차」 외 4편이 제10회 신인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선(選)한 최연수의 목련의 오차 외 4편은 시상을 이끌어가는 시인의 상상력이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돋보였으며, 그 이미지의 표현방식도 참신했다. 이를테면 “무료함을 켜놓고 일 나간 집들/ 익숙한 이름을 들고 다시 골목 칸칸을 두드릴 때면/ 지붕을 밟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목련의 오차」)와 같은 표현이나 ”오물오물 고양이를 아껴먹는 노파“(「고양이캔디」)와 같은 구절은 상상력의 세계와 현실세계가 대면하는 지점의 조화가 적절하게 여겨졌으며, 이 밖에도 많은 구절에서 선명한 시상과 참신한 상상력이 돋보여 시인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다소 아쉬운 점은 주제의식인데 시인이 지닌 언어감각과 시적 기교가 깊이 있는 사유를 이끌지 못하고 있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오감을 동원한 감각적 표현방식에만 집착하다 보면 사유(思惟)나 시인의식이 공소해질 우려가 있다. 한 편의 시가 독자에게 전달하는 내적 의미는 시인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와도 통한다. 이 시인에게는 ‘어떻게’ 보다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를 더 고민해 볼 것을 조언해주고 싶다. 소소한 생활의 발견을 넘어서는 인생에 대한 굵직한 주제를 가지고 씌되 끝까지 진지한 사유의 끝을 놓지 않을 때 이 시인의 장점인 선명한 시상과 참신한 상상력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외에 심사위원들이 최종까지도 망설였던 작품으로는 정선우의 「타클라마칸」 외 9편이었다. 정선우의 시는 오랜 습작시간과 시에 대한 진지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시적 완성도에 집착한 구성이 오히려 시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으며 표현력에 있어서는 참신성과 새로움이 부족해 보였다. 이 시인의 단정함은 제목의 사용에서도 느낄 수 있었는데, 타클라마칸, 까만 자전거, 에스프레소, esquisse, deja vu 등 한 단어로 집약하려는 시제목이 많았다. 시 제목의 사용부터 소재에 이르기까지(사실 「타클라마칸」의 경우 사막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제 사막은 매우 진부한 소재가 되었다) 기존의 (고루한) 방식을 과감히 탈피하고 새로운 구성과 표현의 다양성에 대해 좀 더 고민해본다면 이 시인의 탄탄한 기본기가 장점으로 발휘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선정하지 못해 아쉽지만 언젠가 시단에서 다시 만나게 될 시인임을 확신한다. 꼭 단점을 보완하여 다시한번 응모해주기를 바란다. 한걸음 내딛기 위해 두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하는 아픔을 이겨낼 것이라 믿는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이번에는 비록 당선하지 못했지만 미래의 시인들에게는 더없는 격려를 전하며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의 영광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내일의 비전(vision)이 아니겠는가.

 

 

심사위원 김광기 유정이 전해수(글)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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