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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질마재문학상 _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심사위원 _ 문효치, 장석주, 이은봉
해마다 꽃무릇 (외 5편)
이규리
저 꽃 이름이 뭐지?
한참 뒤 또 한 번
저 꽃 이름이 뭐지?
물어놓고서 그 대답 듣지 않을 땐 꼭 이름이 궁금했던 건 아닐 것이다
꽃에 홀려서 이름이 멀다
매혹에는 일정량 불운이 있어
당신이 그 앞에서 여러 번 같은 말만 한 것도 다른 생각조차 안 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픈 몸이 오면 슬그머니 받쳐주는 성한 쪽이 있어
꽃은 꽃을 이루었을 터인데
이맘때 요절한 그 사람 생각
얼마나 먹먹했을까
당신은 짐짓 활짝 핀 고통을 제 안색에 숨기겠지만
숨이 차서,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것
저 꽃 이름이 뭐지?
내색
꽃은 그렇게 해마다 오지만
그들이 웃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일로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이 있는데
자꾸 웃으라 했네
거듭, 웃으라 주문을 했네
울고 싶었네
아니라 아리라는데 내 말을 나만 듣고 있었네
뜰의 능수매화가 2년째 체면 유지하듯 겨우 몇 송이 피었다
너도 마지못해 웃은 거니?
간유리 안의 그림자처럼, 누가 심중을 다 보겠는가마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미소 친절’ 띠를 두른 관공서 직원처럼
뭐 이렇게까지
미소를 꺼내려 하시는지
여긴 아직 내색에 무심하다
그러니 꽃이여, 그저 네 마음으로 오면 되겠다
허공은 가지를
종일 바람 부는 날, 밖을 보면
누가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을 위해 허공은 가지를 빌려주었을까
그 바람, 밖에서 부는데 왜 늘 안이 흔들리는지
종일 바람을 보면
간간히 말 건너 말을 한다
밖으로 나와, 어서 나와
안이 더 위험한 곳이야
하염없이
때때로 덧없이
떠나보내는 일도 익숙한
그것이 바람만의 일일까
나무가 나무를 밀고
바람이 바람을 다 밀고
저, 저 하는 사이에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커다란 창
창이 큰 집에 살면서 되려 창을 가리게 되었다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야
창이 건물의 꽃이라지만
나는 누추하여 나를 넓히는 대신
창을 줄이기로 한다
간절히 닿고 싶었던 건 어둠이었을까
모순의 창
제 안에 하루에도 여러 번 저를 닫아거는 명암이 있어
어느 날은 그 창으로 꽃을 보았다 말하겠지
어느 날은 그 창으로 비참을 보았다 말하겠지
우리가 보려는 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인데,
왜 창 앞에 자주 저를 세웠을까
돌아보면 거기 누군가의 눈이 있었다고 말해도 될까
누군가는 나를 다 보았겠지만
해부한 개구리처럼 내 속을 다 보았겠지만
창이 왜 낮엔 밖을 보여주고 밤엔 자신을 보게 하는지
그리운 것들은 다 죽었는데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시집『최선은 그런 것이에요』(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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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1955년 경북 문경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뒷모습』『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미네르바》2015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