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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6회 질마재문학상 _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근영 2018. 10. 23. 03:38

제6회 질마재문학상 _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심사위원 _ 문효치, 장석주, 이은봉

 

 

해마다 꽃무릇 (외 5편)

 

   이규리

 

 

 

저 꽃 이름이 뭐지?

한참 뒤 또 한 번

저 꽃 이름이 뭐지?

 

물어놓고서 그 대답 듣지 않을 땐 꼭 이름이 궁금했던 건 아닐 것이다

 

꽃에 홀려서 이름이 멀다

매혹에는 일정량 불운이 있어

 

당신이 그 앞에서 여러 번 같은 말만 한 것도 다른 생각조차 안 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픈 몸이 오면 슬그머니 받쳐주는 성한 쪽이 있어

꽃은 꽃을 이루었을 터인데

이맘때 요절한 그 사람 생각

얼마나 먹먹했을까

 

당신은 짐짓 활짝 핀 고통을 제 안색에 숨기겠지만

숨이 차서,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것

 

저 꽃 이름이 뭐지?

 

 

 

내색

 

 

 

꽃은 그렇게 해마다 오지만

그들이 웃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일로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이 있는데

자꾸 웃으라 했네

거듭, 웃으라 주문을 했네

울고 싶었네

아니라 아리라는데 내 말을 나만 듣고 있었네

 

뜰의 능수매화가 2년째 체면 유지하듯 겨우 몇 송이 피었다

너도 마지못해 웃은 거니?

 

간유리 안의 그림자처럼, 누가 심중을 다 보겠는가마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미소 친절’ 띠를 두른 관공서 직원처럼

뭐 이렇게까지

미소를 꺼내려 하시는지

 

여긴 아직 내색에 무심하다

그러니 꽃이여, 그저 네 마음으로 오면 되겠다

 

 

 

허공은 가지를

 

 

 

종일 바람 부는 날, 밖을 보면

누가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을 위해 허공은 가지를 빌려주었을까​

 

그 바람, 밖에서 부는데 왜 늘 안이 흔들리는지​

 

종일 바람을 보면

간간히 말 건너 말을 한다​

 

밖으로 나와, 어서 나와

안이 더 위험한 곳이야​

 

하염없이

때때로 덧없이

떠나보내는 일도 익숙한​

 

그것이 바람만의 일일까​

나무가 나무를 밀고

바람이 바람을 다 밀고

 

 

 

저, 저 하는 사이에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커다란 창

 

 

 

창이 큰 집에 살면서 되려 창을 가리게 되었다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야

 

창이 건물의 꽃이라지만

나는 누추하여 나를 넓히는 대신

창을 줄이기로 한다

 

간절히 닿고 싶었던 건 어둠이었을까

모순의 창

제 안에 하루에도 여러 번 저를 닫아거는 명암이 있어

 

어느 날은 그 창으로 꽃을 보았다 말하겠지

어느 날은 그 창으로 비참을 보았다 말하겠지

 

우리가 보려는 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인데,

 

왜 창 앞에 자주 저를 세웠을까

돌아보면 거기 누군가의 눈이 있었다고 말해도 될까

누군가는 나를 다 보았겠지만

해부한 개구리처럼 내 속을 다 보았겠지만

 

창이 왜 낮엔 밖을 보여주고 밤엔 자신을 보게 하는지

 

그리운 것들은 다 죽었는데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시집『최선은 그런 것이에요』(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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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1955년 경북 문경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뒷모습』『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미네르바》2015년 여름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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