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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4 《시와반시》 신인문학상 당선작 - 레이스를 짜는 저녁 외4편 / 문성희

문근영 2018. 9. 11. 02:56

[2014 시와반시 신인문학상 당선작] 문성희

 

 

레이스를 짜는 저녁 4

                 문성희

 

 

그녀는 오늘도 레이스를 짜고 있다 나팔꽃은 벌써 꽃잎을 오므린다 그가 준 향기 무늬 도안을 들여다본다 도안은 그의 머릿속에만 있으므로 누구도 그 도안을 가로챌 수 없다 황금빛 실을 꿴 바늘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레이스에는 사막의 물결 무늬가 한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향기를 만지면 허공에 푸른 구멍이 숭숭 뚫린다 순간 선인장 가시 같은 바늘에 손가락을 찔린다 다시 온 힘을 다해 한 코 한 코 더듬어 가다가도 잠시 한눈을 팔자 그 다음 코가 술술 빠져 나간다 한번 코가 풀리자 다음 코까지 잃어버린다 빠져 나간 코를 찾으려고 헤매고 헤맨다 풀린 코에서 푸른혀도마뱀이 술술 빠져 나와 방안을 기어다닌다 잃어버린 코를 다시 찾아 그녀는 뜨개질을 시작한다 빠져 나온 푸른혀도마뱀들이 꼬리를 자르고 술술 레이스 안으로 기어들어 간다

 

그녀는 다시 레이스를 짠다 거기에는 잘린 푸른혀도마뱀의 꼬리가 새겨진다 사방에 푸른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이 들이닥친다

 

 

 

돌의 비밀

 

 

지상의 낙원은 지루하다며

그는 돌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누구와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비밀을 안고

견고한 잠 속으로 숨어들었다

 

누군가의 발부리에 채여

둥글게 살아온 나날들

 

물과 불의 안팎을 뒹군 것이다

 

어둠으로 단단해진 그는

결코 죽지 않았다

 

꿈결 같은 바람이 꿈틀대더니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손금에서 알 수 없는 길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입술 접시*

 

 

입술 너머 컴컴한 구멍 속에는 빛에 닿지 못한 검은

 

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이 더 단단한 어둠이 되기 전

 

에 그녀는 붉은 꽃잎 같은 입술을 찢었다 희디흰 접

 

시를 끼워 넣어 그들이 뛰어놀 둥근 벌판을 만들었다

 

저 안쪽 좁고 어둠에 길들여진 검은 말들이 겨울이

 

사라진 계절이 흐르는 벌판 위로 뛰쳐나왔다 지쳐 쓰

 

러질 때까지 내달리고 내달린다 그들이 빠져 나온 텅

 

빈 입속에 꽃 한 송이 활짝 피어날까 그녀는 오늘도

 

붉은 살점을 찢는 산 죽음의 말이다 그녀는 더 크고

 

광활한 둥근 벌판을 내달리고 싶은 것이다

 

 

* 입술을 찢어 접시를 끼우는 아프리카 수마르족 여인 풍속.

 

 

   

얼굴 없는 그림자

 

 

낡은 외투 속에서 얼굴 없는 그림자가 빠져나온다 옷걸이에 나란히 걸리는 그림자, 목이 길어진다 그림자가 옷장 속 깊은 곳을 굽어본다 울창한 숲 너머로 드넓은 초원이 보인다 앙상한 가지로 남은 나무들이 서 있다 목 잘린 기린이 붉은 혀로 빈 나뭇가지를 핥는다 물 먹는 하마가 초원 위를 빙글빙글 돈다 점점 사라지는 발목 얼굴 없는 그림자도 초원 위로 달려가 하마와 함께 돈다 후두둑 비가 내린다 강물 위로 떨어지는 둥근 빗방울 소리 하마가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사라진 발목이 둥둥 떠나닌다 그림자도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사라진 얼굴이 둥둥 떠다닌다 잘려나간 기린의 얼굴도 푸른 잎사귀로 돋아난다

 

옷장 문을 열자 나프탈렌처럼 점점 사라지는 풍경, 어디선가 캄캄한 빗방울 소리만 들려온다

 

 

 

 

 

바다의 서랍

 

 

늦여름 해변에서 주워 온 돌들이 들어 있는 서랍 속에는 온종일 바다가 뒤척였다 나는 언제나 잠들지 못한 돌의 안부가 궁금하다 돌에게 묻는다 너를 움켜쥐었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을까 거센 파도에 밀려왔다 밀려가는 돌들 나처럼 아플까 물거품처럼 피어난 적막에 늙어갈 시간만 남았다는 듯 무심히 왔다가 부서지는 파도의 얼굴은 하얗다 내 오랜 그늘처럼 검은 뻘들이 서랍 속에서 웅웅대던 나날들 너무 많은 나를 삼킨 파도가 기어이 달려오기 시작한다 바다는 와르르 서랍을 여닫으며 수평선을 그었다

 

 

 

 

 

 

문성희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졸업.

배제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수료.

2009년 제7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 수상.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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