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14 계간 《시와문화》신인상 작품 / 김림
아버지의 등 / 김림
딱 한 번 업혔던
아버지의 등을 기억한다
언젠가 31빌딩 꼭대기층에서 보았던 그 높이
열 살배기 눈높이엔 너무 아득하여 울었다
장난스레 흔들리던 등
떨어지지 않으려 잔뜩 그러쥔 손바닥엔
진땀 같은 눈물이 배였다
견고하게 직조된 무늬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밧줄이었다
툭,
밧줄이 끊어진 날
예고도 없이 끊겨버린 필름 속에서
어둠과 침묵이 교차 상영되었다
쿵!
떨어지는 자막들
읽혀지지 않는 비가 내렸다
지지직 잡음이 타들어가는
오래된 흑백영화 속에서 타고 내려간
시큼한 땀냄새 셔츠가 미끄러웠다
손을 놓치며 그때 보았다
까마득히 높아져버린
다시는
오를 수 없이
자꾸 자꾸 멀어지던 아버지의 등.
늙은 밥그릇 / 김림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그득한 빗발의 보시
거친 구둣발에 채인 늙은 밥그릇에 잿빛 하늘이 담긴다
제 키를 훌쩍 넘는 박스(Box)塔 아래 비를 피하는 저 노인
허둥허둥 어깨가 땅 속으로 들어간다
빗줄기가 사납게 등짝을 후려치고 간 다음
퉁퉁 불어 식어빠진 라면 한 그릇
바싹 마른 위장으로 밀어넣는다
한바탕 소나기에 쫓기는 오후
퍼뜩 정신을 챙겨 걸음을 옮겨보지만
정작 걸음보다 먼저 나가는 마음이다
꼬깃꼬깃 비닐로 싼 쪽지 한 장
아들이 떠나가며 적어둔 행적은 여전히 오리무중
알아볼 수 없는 꼬부랑 글자가 어지럽게 번져있다
한참을 따라가보는 종이 안의 길들
미로처럼 얽혀 있는 저 어딘가에 아들이 살 것이다
손자의 웃음소리가 멀다
건너편 아파트 불빛이 자꾸 흐려진다
이 놈의 노안老眼
몇 배는 무거워진 리어카를 겨우 끌고가며
얼룩진 눈빛을 골목마다 대문마다 걸어둔다
빗물을 튕기며 빠르게 스치는 차창 안의 여자가
가자미 눈으로 노인을 할퀸다
여자는 지금 아이를 수거하러 가는 중
우포늪에서 / 김림
날갯짓을 멈춘 채
물속에 머리를 박고
인간은 들여다 본 적 없는
침묵을 본다 물밑 아득한 어둠 속
아직 떠오르지 못한
오래도록 케케묵은 전설이
하품하듯 번지는 소용돌이
햇빛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저 너머의 그림을 쪼아대듯
태양과 수면 사이를 오고가는 새들이 부산스럽다
심연은 반항하듯 떠오른다
비밀 하나씩 제 몸 안에 묻어둔 채
진흙 위로 드러누운 세월이
문득 잠을 깨는 우포에서 수다는 멈추었다
헐벗은 억새들이 소문을 옮기는 늪지
움푹 파인 동공에 다소곳이 빗물이 고인다
소문을 머금은 오래된 발자국
까르르 날리는 웃음자락에 늪은 술렁인다
소녀의 볼우물에 살짝 고이는 물기
무턱 시대 / 김림
운명을 재단해드립니다
매끈하게
시원하게
노년운은 V라인에 맡기세요
대형마트 선전 문구처럼 내걸린 처방
성형외과 이정표는 명쾌하다
불운을 맡기시고
돌아가는 길에 행복을 찾아 가시면 됩니다
인생의 순순탄탄 직항로를 안내해 드립니다
노년이 길고 지루했을 사람들
덜어낸 턱 조각만큼 행복해졌을까
무엇이든 해결해드립니다
만능해결사 현판을 내건 흥신소 앞
번화한 중심도시의 문이 피로를 호소한다
퉁퉁 부은 종아리로 하루를 버티는 門
앉고싶은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는 저 턱
장벽을 없애주세요
휠체어바퀴에게 비정했던 문턱을 깨뜨려주세요
거침없이 내닫는 생각 금지 시대
턱을 깎아드립니다
오늘도 성업 중인 無턱 시대
동백의 노래 / 김림
죽음이 어찌 저리 아름다운가
선홍빛 주검
발자국마다 포개어진 낭자한 피
삼천 궁녀의 치맛폭이 예 있구나
미련은 허락되지 않아
슬픔조차 사치인 것을
차마
눈도 못 감은 채
참수형에 처해진
너의 죄명은 미혹美惑
느릿느릿 기지개 켜며 오는
花信보다 앞선 죄
잘리운 머리가 하늘을 본다
다가오다 멈칫
얼어버린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