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궁서체 / 차주일

문근영 2018. 9. 11. 02:54

궁서체

 

   차주일

 

 

 

목련꽃봉오리가 화선지에 먹물 스미듯 부풀고 있다.

붓이 한 획을 내려 긋기 전

점 하나 힘주어 누르는 저 잠깐을 겨울이라 부르겠다.

우듬지마다 찍어 놓은 꽃봉오리를

한 무리의 말발굽소리가 내처 달려오는 중이라 말하겠다.

오직 북쪽만 향하던 외골수가 잎보다 먼저 피운 꽃

그 낙화를 겨울이 내려놓는 잔상이라고 말하겠다.

꽃 진 자리에서 햇잎이 길어난다.

넓어지는 잎 따라 바람의 획이 굵어진다.

바람의 그림자가 먹물 스미듯 땅 위에 퍼진다.

이 가필을 봄이라 부르겠다.

말[馬]의 땀내 짙은 향기를 봄의 속도라 말하겠다.

당신 몸에서도 봄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어머니

봄철 내내 궁서체 'ㅣ' 내리긋기 습자 중이다.

한 획 채 내리긋지 못하고

봄 한 철 차마 놓아주지 못하고

목련꽃봉오리 같은 먹점을 화선지에 가득 채워 놓았다.

보다 못한 내가 참견하는 것을 이른 봄이라 말하겠다.

어머니, 당신의 굽은 손가락 끝마디 하나 만들고

손가락 두어 마디 쭉 내리그으세요.

내 뒷머리 쓰다듬다가 냅다 내 손을 쥔 속도로 말이에요.

먹점 위에 다시 먹점을 찍어보던 어머니

굽은 채 굳은 열 손가락 끝마디를 하나하나 만져본다.

그래 이제 갈 때가 되었구먼, 어머니 혼잣말이

내 성대에 조율한 침묵을 나의 겨울이라 부르겠다.

뒷목덜미께 고이는 이 온기를 봄맞이라 말해야만 하는가.

어미 몸에서 내게로 내처 달려오는 무채색의 온기

내 몸에서 펴나므로 내가 모음이 되리라.

그때 나는 비로소 아들의 손을 쥐고

궁서체 'ㅣ'처럼 고개 숙여 한 손의 서사를 들려주리라.

 

 

 

                                    제6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젊은 작가상 수상작

                                                          —《현대시학》201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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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일 / 1961년 전북 무주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수학.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냄새의 소유권』.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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