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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에 신인상 시 당선작] 권위상 / 바다 외 2편
바다
1. 바람은 늘 갯벌로부터 불어왔다 망각(忘却)도 수없이 반복한 일상의 중턱에서 살아간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거품을 튀기면서 일깨우던 바다 발목을 빠뜨리고 유년의 기억을 하나 둘 흔들어낸다 이 작은 항구가 꿈꾸어오듯 파도는 온몸으로 꿈을 밀어밀어 닿아야 할 그리운 나라로 손을 뻗치는데 새하얗게 부서지는 갈망 그리움이 닿아야 할 곳은 어디인가
낡은 전마선(傳馬船)이 어깨를 비비며 잠을 뒤척이는 새벽 네 시 우리가 지은 죄를 죄다 토해놓고 저 무수히 반짝이는 눈 별빛으로 어둠의 한켠에 내재율의 사랑을 모아본다 긴 호흡의 해저(海底) 일렁이는 침묵 속에서 만삭의 달은 갯벌에 달을 낳고 우리들의 가슴에도 포만의 달을 낳고 그리고 서서히 지워지는 안개의 꽃
2. 누가 저렇게 아름다운 선(線)을 그어 놓았는가 팽팽한 수평선 생활의 목판화를 뜯어내면 그 뒤로 새로운 일과(日課) 한 장 일어서고 우리는 다시 삶의 작도(作圖)를 시작해야 한다 흉금을 털어놓듯 가슴의 대문을 활짝 열면 방금 튀어오른 생선 같은 싱싱한 아침이 죄 한 점 없이 걷혀지고 내항(內港)에 갇힌 바다를 보듬고 돌아서면 살아있다는 의지가 용서한다는 의미일까 바람은 육중한 과제(課題) 하나를 툭 던져준다
오늘도 바람은 갯벌로부터 불어온다 끊임없는 간섭(干涉)의 갯바람 머리칼을 쓸어 올리다가 문득 멈춘 갯바람에 뒤돌아보면 절반(折半)의 바다 그 아스라한 그리움
슈더에게
사람들은 네 목소리가 감미롭다 하더구나 아이스크림이 녹듯 혹은 가을 낙엽이 바람에 구르듯 그대 노래에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대 손가락을 연상한다 여섯 가닥 기타줄을 기막힌 기교로 뜯어내는 그리하여 공허한 소년의 가슴에 서정을 채워주던 그대 안경너머 근시안 시력이 어디에 찔려 피가 날까 두려웠다 노타이나 진바지의 남루한 자유가 테러나 폭행, 납치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러나 군중 앞에 당당히 선 그대 반전(反戰)의 평화적 시위에 앞장서서 기아와 빈곤을 호소하고 그때 우리는 그대 노래만큼 파아란 사상에 가슴 깊이 사랑을 싹 틔웠지 이후 우리는 성장하여 가정을 갖고 직장을 갖고 일상에 충실하려 애를 쓰며 주식이 얼마나 올랐을까 걱정하며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전쟁을 무수히 치렀지
어디서 쿠테타가 났을까 사람들은 다급하게 비명을 마구 뿌려놓고 나는 석간지를 황급히 찢어 스크립한다 뜻밖에 신문지 뒤에 반쯤 잘린 그대 얼굴이 우리들의 청년시절을 더듬게 하고 완벽한 늪에 빠진 듯 그 뒤로 하드록으로 바뀐 이 시대에 너는 허약한 미소를 지으며 지금 뉴욕 어느 값싼 호텔 라운지에서 아직도 은은하다고 주장하는 네 목소리가 악보 따라 불리워지고 있겠지 슈더, 한때는 나도 무척 그대를 좋아했지 가사의 뜻도 모르고 노래를 따라 불렀지 지금 막 필요 없어 버려야 할 신문지 뒤의 잘린 네 모습에서 살아있다는 막연한 생의 애착이 오뉴월 광장의 분수처럼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다
겨울 강
잠은 숲의 심연(深淵)에서 빠져나와 불면의 아침을 흔들어 깨운다 멀리 석기시대로부터 뚜렷한 강의 흔적 하늘로 뻗어있고 강을 누르는 묵직한 정적을 비집고 무명의 새가 낮게 하강한다 우리가 이른 아침잠을 털어내고 다시 출발을 준비하는 겨울아침 누구와 함께 거닐면 외롭지 않을까 젖은 모음(母音) 하나 아, 하고 계곡에 던지면 겨울 산은 조금씩 흔들리다 쪼개져 방울방울 구르는 눈물을 뿌린다 눈이 내린다 미덥지 못한 계절의 끄트머리에서 다시오마, 약속하지 못한 슬픔이 수직으로 우리들의 가슴에 떨어지고 보였다가 다시 사라지는 길처럼 운명은 처음부터 예측치 못했던 그리하여 내내 한쪽으로만 흘러야 하는 그대 겨울 강은 아직 숲의 가슴이다
시 부문 당선소감 / 시라는 마약, 오늘도 한 사발 들이킵니다
오랫동안 당신을 짝사랑해왔습니다. 그러나 호구지책, 쫓기듯 바쁜 일상은 늘 발목을 잡았습니다. 가끔 시간을 쪼개 당신 근처에서 배회도 많이 했습니다. 작심하고 유희를 위해 세레나데를 부르며, 깊이 동침하고 싶었으나 당신은 함부로 몸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써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내내 몸살을 앓아왔습니다. 뚜렷한 처방도 없고 회복도 불가능한 마음의 병, 그 가슴을 후빈 상처가 흉이 진 후 아직도 아물지 않은 후유증이 지금까지 지속되네요. 그러나 그 후유증, 오래 간직하고 싶습니다.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아픔 속에서도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마약을 하고 싶습니다. 마약은 이래서 못 끊는 가 봅니다. 시라는 마약 말입니다. 마약을 마음껏 흡입할 수 있도록 저를 놔주십시오. 수갑을 채우지 마십시오. 당신을 더욱 더 짝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마약 한 사발을 들이키겠습니다. 임헌영 소장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시에』 회원들께도 인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권위상 / 부산출생. 울산대학교 산업공학과 졸업. 1985년 『시문학』 주최 전국대학문예 입선. 현재 (주)예술과기술 대표이사,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
[2012 시에 신인상 시 당선작] 박기임 / 몸살 외 2편
몸살
바람이 나무를 건드린다 손발시린 나무의 갈색 피부가 두터워 보인다 이제 미련한 옷은 그만 껴입어야지 말할 때 온몸이 훅훅 쑤셔온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일까 담장 너머 꽃샘추위가 잠이나 자라는 시늉을 한다 바늘들이 온몸에 숨구멍을 내주어야 몸이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꽃도 잎사귀도 매달지 말고 그냥 누워있으라 한다 나무는 모처럼 길게 드러누웠다 한 곳만 반추하던 분침 속을 기어 나와 제 몸보다 더 길게 드러누웠다 그때 바람이 뿌리 주위를 윙윙거리며 나무에게 말을 걸어 잠을 깨운다 그제야 나무는 지금까지 누워있던 게 제 몸의 낡은 그림자였다는 걸 알았다 나무는 뿌리를 쓰다듬으며 겨우내 오른 열꽃을 닦아내기 위해 오늘 봄비를 맞는다 몸에서 먹물 같은 수액 빠져나가고 새살은 활짝 피어난다
자전거 위에서
한쪽으로만 쏠려 살았다 바퀴 위에서 균형을 잡기란 어렵다 삶의 구간을 놓친 만큼 흔들리거나 넘어져야 하는 불안은 기억의 저편에 앉아 늘 습관처럼 헛바퀴만 돌려대고 있다 일순간 브레이크를 잡을 줄 몰라 엇도는 시간을 정지 시킬 수도 없다 가끔은 기울기가 서로 다른 세상 밖으로 너와 나는 코를 박으며 비스듬히 넘어진다 분명 오른쪽이거나 왼쪽이겠지 방향은 쉽게 틀지만 허공 짚을 때가 더 많다 어디론가 매암 굴러가고 싶은 바퀴 오늘도 경사진 생각의 담을 넘지 못해 제자리에 서서 길을 잃는다 누군가는 반복이 미덕이야 뭉뚱그려 말하지만 내 외눈박이 생은 여전히 마음 줄을 잡지 못해 더듬거린다 철커덕, 체인 풀리는 비명 내 늑골에 와 감긴다
길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구부정한 잔허리를 버팀목 삼아 손수레를 끄는 노인이 있다 빗물에도 젖지 않을 것 같은 묵은 삶의 뭉치들 봉긋이 싣고 골목을 나선다 가끔, 웃음 헐렁한 사람들 틈새에 끼여 둘둘 말린 자판 위의 기억들을 천천히 풀어 놓기도 한다 남편을 잃고 생떼 같은 자식을 잃고 가슴 탕탕 치며 걸어온 길 생의 뒤축 닳아 없어질 때까지 꾹꾹 찍어 길 묻는다 새로운 길을 만들려면 지문은 그만큼 지워져야 했다 그렇게 눈길을 쓸듯 건너온 시간들 남은 자식을 먼저 건너게 하고 노인은 푸른 신호등을 놓치고 만다 붉은 신호등을 대신 좌판 삼아 새로운 길을 펼친다 좌판에 그리운 시간이 지나가면 해거름만 손님들을 찾아 나선다 멀미를 하듯 지문을 따라 기억을 빠져 나오는 데만 수십 년, 노인의 손을 더듬어 보지만 그곳엔 지문이 없다
시 부문 당선소감 / 빈집 허물기
길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끊어질 듯 아플 때가 있다. 그럴 때 어김없이 찾아와 길이 되어주고 벗이 되어준 시에게 고맙다. 그는 나를 혹독하게 질책하면서도 삶의 축이 되어주고 위안이 되어 굽은 내 길을 평평하게 잡아주기도 한다. 또한 연목이 되어 시린 마음에 온기를 덧대어 주기도 한다. 가던 길을 그냥 놓을까 하면 다시 발목을 잡아끄는 시혼이 여기까지 나를 인도한 셈이다. 이제야 시작이라는 예감이 든다. 시를 쓴다는 게 결코 쉬운 길이 아니란 것쯤은 겪어서 이미 알고 있다. 고통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의 실체를 찾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시는 빈집을 한 채씩 지었다 다시 허물기를 반복하라 할 것이다. 거기에 시의 사물과 언어로 채울 것을 당부할지도 모른다. 당선소식은 내 영혼의 단비와도 같다. 기다리는 시간 내내 시가 나를 멀리하면 어쩌나 안절부절하던 내 마음을 가라앉히는 동시에 시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욕심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는 계기가 되었다. 기쁘면서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미숙한 글을 마음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시에』에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시인이란 이름이 새겨진 만큼 부족한 부분은 내 몫으로 알고 게으름 피우지 않을 것을 약속드린다.
박기임 / 대전 출생. 한남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료. 『큰시』 동인.
2012년 시에 시 신인상 심사평 / 삶의 깊이와 시적 여정
요즘 신인들의 시를 보면 잘 쓴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시에 대한 열정이 큰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나 한편 아쉬움도 크다. 대부분 시편들은 개성이라는 명분으로 삶과 괴리된 이질적인 언어, 관념어를 남발하고 있다. 어찌 보면 시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한편 시의 조잡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 쓰기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런 시들은 때로 시단의 신선한 활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 폐해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신인상에 투고 되는 시편 역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이번 신인상에 투고된 예비 시인 100여 명 가운데 권위상, 김일곤, 박기임, 백명순, 유정원, 이정숙, 현상택 씨의 작품이 최종심에 올랐다. 심사위원들은 일차적으로 시의 자연스러움, 시의 형식과 내용이 안정된 삶의 언어에 충실한 작품을 선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잘 다듬어진 시보다는 앞으로 지속 가능한 시를 담보한 신인을 발굴하는데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권위상, 박기임 두 시인을 뽑았다. 권위상, 박기임의 시편들은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편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이들을 신인으로 배출하는 동인은 삶의 깊이와 시적 여정을 중요하게 봤기 때문이다. 한 가지 크게 당부하자면 소재의 다양성을 통해 보다 깊은 시의 맛으로 감동과 기쁨을 선사하는 시인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것이다. 두 분 당선자에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이재무(시인) 공광규(시인) 양문규(시인·본지 주간) ─『시에』 2012년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