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작/ 김해준

문근영 2018. 9. 11. 02:32

<1>-한 뼘의 해안선/김해준-

 

  마른 국화를 태워 연기를 풀어놓는다. 꽃잎이 불씨를 타고 오그라든다. 별들로 판서된 역사가 쇠락한 하늘 아래, 야경

꾼의 홍채에선 달이 곪아간다. 통금의 한계에 닿아 부서지는 경탁 소리가 시리다. 첫 기제의 밤이 젖어간다.

 

  된서리 맞고 실밥 모양으로 주춤주춤 경계를 얼려가던 복부에서 비린내가 터져 나온다. 절개했던 자리가 하얗게 번뜩

인다. 새어머니는 훗배앓이 중이다. 뻘에서 태어난 입술에서 고동 소리가 샌다. 물려받은 반지의 녹이 지난 맹세로 생식

한다.

 

  태어난 해안에서 침몰해가는 유년. 바리캉으로 밀어낸 태모가 이방에 닿아 바람으로 분다. 가마의 계절풍은 성장을 멈

추고, 내가 가졌던 땅을 만조로 삼키는 병풍이 펼쳐진다.

 

  유쾌했던 이름이 글썽이며 타들어간다. 문간에서 날린 살비듬이 어떤 풍향을 탔는지 나는 모른다. 술잔에 내린 테를 삼

켜 캄캄한 바다. 두 명의 어머니가 같은 연안에 이불을 깐다. 해진 안감에 귀를 묻고 손금이 크는 소리를 듣는다. 빛과 어

둠이 범벅된 하늘이 몸 안으로 새어든다.

 

 

<2>-상처/김해준-

 

 

옥탑은 섬이다. 주민들은 난간을 경계로 마주한다.

달은 집열등이 되어 고향이 그리운 사람의 눈을 빼앗고

이사 온 중국인 부부는 체위를 바꿔가며 그림자극을 한다.

 

  곪은 달이 빠져나왔다 모낭을 찢고 완숙이 된 염증 주위로 구름이 멍들었다 대기가 천천히 말라 벼락을 뿌렸다 젖은 땅

에서 풍장 냄새가 났다 어둠이 썩고 나자 짐승들이 눈을 떴다 가문 사회에 촉을 틔우는 눈알들, 몇몇 고양이가 보호색을

입고 하얀 발로 달을 만졌다 묽어진 빛이 눈가에 번졌다 통증이 천천히 실핏줄을 점거했다 충혈된 뿌리에 감긴 사물들이

선명해졌다 천공에 상처가 덧씌워지고 덜 여문 달은 새로운 무늬를 몸에 새겼다 헌 달은 부스러져가는 순간에도 땅에 그

림자 묘석을 올렸다 싸르륵 잔상이 퇴적했다 얇은 일력의 페이지 밑으로 다음 날이 비쳤다 여태 찢어버렸던 지평선이 붉

게 물들어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한 상처는 어제의 나이테를 둘렀다 과거가 간절한 이들은 제 흉곽에 상처를 심는다

 

 

 

<3>-그믐밤/김해준-

 

 

  투계 한 쌍이 그림자를 섞는다. 허블렌즈 속 투기장에서 피를 흩뿌린다. 깃은 성운의 성분으로 붉게 물든다. 부리를 견

주던 우주 하나가 저문다. 왼쪽 얼굴이 사라진 닭이 죽은 닭을 지나 주인 쪽으로 걷는다. 깨진 온도계가 된 눈 속에서 인

간들의 표정이 녹아간다. 시야가 목뼈 아래로 흘러내린다. 발자국이 유리 파편으로 흩어진다. 울음만 따로 모여 개의 어

금니에서 부서진다.

 

  장부에 걸린 머리들, 무제 노트는 말간 작두다. 닭은 무당 옷을 입고 죽는다. 털을 뽑아내면 소복 차림으로 상례를 갖춘

다. 살로 제찬을 펴고 뼈로 육장을 끓인다. 볏은 사형수의 명찰로 질기기만 하다. 돈 잃은 자는 땅에 담배를 비벼 끄고 장

부에 지장을 찍는다. 잘린 목이 줄줄이 효시된다. 맹세를 처형당한 남자는 엄지를 자른 기억으로 고기를 정리한다. 살기

위해 쾅쾅 닫았던 울음이 필요 없어진다.

 

  숫돌이 둥근 눈썹으로 웃는다. 날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진다. 물의 낯빛이 붉어질 때까지 뻔뻔하게 전희를 한다. 남자는

한월에 칼을 말리고 숨소리를 듣는다. 날 위로 얇은 얼음이 언다. 비명이 잠시 쉬어간다. 절명을 발음하기 위해 잡육이 쌓

인 구덩이의 목울대는 깊어진다. 몇 마리의 닭이 죽음을 예감하고 헛웃음을 친다.

 

 

 

<4>-비몽(悲夢)/김해준-

 

 

  발톱을 깎으며 티눈이 육신의 얼룩이었음을 안다. 양말 속에서 꼼지락거렸을 피스톤에 유년과 초야의 감정이 번져 있

다. 휘발성 기억이 말초에서 지독한 촉을 틔웠다. 바람의 가지를 탄 냄새가 밀실에서 무성해졌다. 작업을 끝낸 인부들이

서로의 코골이를 피해 발과 얼굴을 마주하는 밤. 주머니 속에서 꺼낸 임금봉투에는 새로 산 팬티물이 옮아 있었다. 전표

에 뻗은 숫자는 등록금을 막을 방벽이다. 결국 담을 밟고 이동하는 고양이의 보폭으로 계절을 뛰어넘으며 노동을 했다.

그해 나는 동공의 우산을 접고 뱀눈 뜨는 법을 배웠다. 암굴에서 시간 버리는 연습을 했다. 스스로 껴안고 잠든 밤마다 고

양이를 삼킨 구렁이가 되어 오랫동안 악재를 소화했다. 소변을 누며 옛 꿈을 꾸었고, 좌변기에 뜬 얼굴을 달로 보는 밤이

잦아졌다. 굳은살이 손금을 막아 운수가 나빠졌지만 삽질을 멈추는 날이 없었다.

 

 

<5>-요질(腰絰)/김해준-

 

 

  들보를 꺾기 위해 숨을 참는다. 맥박이 등골을 지나 열어놓은 지붕 밖을 흔들어놓는다. 빛이 연목을 조르고 있다. 단단

한 기합으로 인부들의 팔심까지 그림자가 뻗친다. 낯살을 드러낸 기둥이 흙을 토해낸다. 아랫목의 때가 푸주만치 비리다.

무너진 채 마룻대를 떠받든 기둥이 냄새를 맡고 이빨을 드러낸다. 묵었던 먼지가 허공에 핏발을 세운다. 기울어진 추녀에

서 그랭이 뜬 줏대까지 한 번에 무너질 참이다. 만 갈래로 찢어진 장력이 손안에서 부들거린다. 태양이 파먹은 중추가 눈

앞에서 휘어진다. 부연이 날개를 접으며 심장까지 신호를 낸다. 땅을 박차 일 합에 허리를, 이 합에 숨을 끊는다. 땅이 울

리고 하늘이 천장을 떠나 날아오른다. 허물어져 꽃피운 폐허. 백 년을 산 굴참나무가 잎을 버리고 탯줄로 남았다. 극락조

몇 마리가 터를 둥지로 보고 앉았다 간다. 손끝을 떠난 힘이 난각 깨는 소리로 들썩인다. 뜰이 바람을 입고 세간 냄새를

버리던 찰나, 뱀 머리 모양으로 매듭진 밧줄이 틈을 미끄러져 나온다. 아가리에 물린 목질이 쌍꺼풀을 뜨고 빈터를 응시

한다.

 

 

<6>-안마사/김해준-

 

 

-백안 속 실핏줄의 고도가 가파르다 농담이 깊으나 맺히는 상은 없다 동공을 덮은 구름은 바람을 타며 흰 촛농으로 굳어간다 멀리서 태양이

꺼지고 기억으로 응고한 연못 두 개가 허공을 담아 소금밭이 된다 악몽에서 태어난 비문(飛蚊)이 나락으로 회귀하려 여자의 눈꺼풀을 간질인

 

  암실의 벽은 서로의 평행마다 같은 자성을 띠고 대칭한다. 어둠 속에서 벽과 벽은 서로 멀어진다. 몸의 터럭이 쇳가루

로 일어선다. 감광이 안마사의 등 뒤에 곰팡이로 슬어 착상한다. 몸이 문과 일식을 하며 실루엣을 팽창시킨다. 방이 그림

자의 장기가 된다. 비림과 축축함이 죽은 전등을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바람벽 너머는 이국이다. 팔에 우거진 핏줄이 철책이 되어 여자를 가둔다. 유년의 기억을 고열로 날리고 잿빛 머리카락

을 바람 부는 쪽으로 쓸어내린다. 벽을 두고 내왕하는 흐느낌에는 적이 없다.

 

  안마사는 눈을 감는다. 꿈과의 경계를 눈꺼풀로 잠근다. 동공을 두레박으로 심연 끝까지 내려본다. 눈물이 머리를 밀며

피부 속으로 스며든다. 우글우글한 슬픔이 얼굴 밖으로 돋는다. 살마다 세로로 뜯어진 눈이 차가운 굴속에서 깜박거린다.

입 벌린 뱀을 닮은 생식기, 독에서 잉태된 아이들이 피임기구 안에서 목을 매단다. 습(襲)할 몸도 없이 무색으로 일렁이는 공중을 적소로 삼는다.

 

  향초를 손가락으로 비벼 끈다. 시간의 속눈썹은 뜨겁고 계면을 넘어선 이는 꿈에서 멀어진다.

 

 

<7>-소립자들/김해준-

 

 

  척수로부터 올라온 감각이 뇌에서 구름으로 맺힌다. 사람마다 다른 억양으로 구부러진 연한 살덩어리. 혀와 뇌가 같은

재질임을 안다. 흉곽 쪽으로 쓸어놓은 언어가 진창이다.

 

  허기에 눈 밟는 소리가 난다. 심장이 품을 두드리며 죽음 앞을 서성일 때, 등은 내가 지나온 시간과 공간의 끝에서 골목

을 사수한다.

 

  눈앞에는 과거를 포장했던 껍질만 남는다. 뇌는 적막할 때만 그 시절을 핥는다. 울음과 걸음이 비례하는 동물 신발을

신고 방금 내린 눈에 발자국을 새긴다.

 

  폐기종 선고를 받고 만성이라는 성질을 얻는다. 나의 재질은 이미 그림자였으니 햇볕으로 얼굴을 씻어도 그늘만 농염

해질 뿐이다. 가슴을 훑고 간 엑스선에는 옛 연인의 실루엣만 기록되었고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다.

 

  기억이 영하로 내려가자 뇌는 두개골 벽면을 샅샅이 긁어놓는다. 나는 기낭이 되어버린 폐를 위해 손가락을 불쏘시개

삼아 자판을 두드린다. 그을린 단어 몇 개가 자모로 갈라져 부서진다.

 

 

<<김해준 시인 약력>>

*1985년 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출처 : 애지문학회
글쓴이 : 박종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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