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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바마시대와 한국 ⑨ 『오바마가 떠맡은 국제적 짐들』 / 김종철

문근영 2018. 9. 10. 00:35

 

 

오바마시대와 한국

2. 오바마가 떠맡은 국제적 짐들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위기만으로도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텐데, 심각한 문제는 나라 밖에도 수두룩하다. 오바마가 국제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아들 부시와 ‘네오콘’이 뿌린 독버섯의 씨앗에서 끝을 모르고 자란 문어발 같은 것이다. 그것은 거슬러 올라가서 로널드 레이건에서 비롯되고 아버지 부시가 더 악성으로 만들어버린 이른바 ‘일방주의’와 ‘일국 패권주의’의 산물이다. 사람은 왼쪽과 오른쪽이 균형을 이루어야 바로 걷고, 건강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레이건 이래 공화당 대통령들은 오른쪽으로만 걸어가면서 왼쪽은 보지도 않으려 들었다. 그들에게는 중간도 없었다.

‘일방주의’와 ‘패권주의’로만 치달은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은 요즈음도 미국인들 다수가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위대한’ 축에 든다고 꼽는 인물이다. 나는 그의 재임기간에는 물론이고 퇴임 뒤에도 그것이 미국인들의 정치적 문맹에서 비롯된 ‘우상 숭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미신은 아직도 미국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레이건은 영화배우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는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배우였다. 그는 유레카대학을 졸업하고 아이오와대학교 미식축구 중계방송팀에 취직한다. 그는 그 뒤 라디오방송의 야구 담당 아나운서로 일하다가 1937년에 워너브러더스영화사의 연기자로 들어간다. 레이건의 영화배우 경력은 ‘2류’라는 평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가 할리우드에서 주로‘b급 영화들’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1941년에 영화배우조합(SAG)의 이사가 된 뒤 1947년에 마침내 이사장으로 뽑힌다. 그는 할리우드가 험한 사건들을 겪던 시기에 노사분규에 개입해서 사용자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결책을 마련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또, 1947년에 월트 디즈니와 함께 하원의 ‘비미국적 활동 조사위원회’(HUAC)에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인들에 대해 증언한다. 레이건은 미국 영화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은 심각하다고 말함으로써, 뚜렷한 증거도 없이 ‘빨갱이’로 몰린 동료 영화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단순히 그의 증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냉전’시대의 비이성적 ‘마녀사냥’에 몰린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 등 ‘할리우드의 10인’(Hollywood 10)은 오래 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어야 했다.

레이건, 공화당으로 옮겨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존경하는 민주당원이었던 레이건은 1950년대에 ‘더 작은 연방정부’를 바라면서 공화당으로 옮긴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그는 1967년에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된 뒤 8년 간 연임한다. 그는 1976년에 현직 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에 도전해서 대통령후보로 나섰다가 실패하고, 마침내 198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를 누르고 대통령이 된다. 그때 그는 무려 미국 50개 주 중 44개 주에서 이겼다. 이것으로 미국에서 ‘레이건 신화’가 시작된다.

레이건의 첫 번째 임기인 1981~85년은 ‘축복’으로 열린다. 카터 대통령이, 호메이니가 지도하는 이란 혁명정부의 전위대인 청년들이 테헤란에서 억류하고 있던 미국인 인질 52명을 구해내서 대선의 호재로 삼으려고 그렇게도 애타게 노력하다가 실패했는데, 얄궂게도 1981년 1월 20일  레이건이 취임연설을 하는 시간에 그들이 석방된 것이다. 그는 그해 3월 3일 한 청년에게 저격당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보수주의의 길로 치닫는다. 그는 파업을 하던 연방 공항관제사 1만1,345명이 복귀 명령을 거부하자 조합을 박살내버린다.


여론이 그것을 지지하자 의기양양해진 레이건은 공급자 위주의 경제학에 바탕을 두고 고전적인 자유방임 철학을 제창하면서, 대대적인 감세로 경제를 활성화하는, 이른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에 시동을 건다. 아더 래퍼의 경제이론에 바탕을 둔 레이거노믹스는 일부 주요 경제지표들이 개선되자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연방 재정적자와 국가 채무가 크게 늘어나자 심한 비판을 받는다.


경제정책으로는 상당한 지지를 받은 레이건은 국제문제에서는 냉혈한이자 무법자였다. 그는 1983년 10월 25일, 1979년의 쿠데타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이 들어선 그레나다를 미군이 침공하도록 명령한다. 베트남전 이래 최초의 주요한 작전에서 미국은 단 19명의 전사자와 10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그레나다에 꼭두각시 정부를 세운다.


이란에 불법 무기판매도


레이건의 ‘냉전 확산 작전’은 무한궤도에 들어선다. 레이건은 카터 행정부가 지키던 ‘데탕트’(화해) 정책을 뒤엎고, 미국 군사력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한편 소련을 겨냥하여 일련의 첨단무기들을 양산한다. 레이건 행정부는 ‘레이건 독트린’이라고 알려진 것을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정권들을 공략한다. 소련을 멸시하고 저주하는 말들을 계속 퍼붓던 그는 1983년 3월 8일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른다.(아들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비난한 것은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뒤의 일이다)


레이건은 두 번째 임기중인 1986년 4월, 리비아가 독일 베를린에서 폭탄 테러를 저질러 60여명의 미국인들을 살상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나라를 무차별 폭격한다.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가 니카라과의 반정부군인 콘트라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이란에 불법으로 무기를 팔았다는,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이 1986년에 미국과 세계를 시끄럽게 한다. 레이건은 ‘반공’과 ‘테러 분쇄’를 위해서라면 국내법과 국제법을 서슴지 않고 유린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그것이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에게 유전된 셈이다.


레이건의 ‘공산주의 타도 운동’은 그가 1989년 1월에 대통령직을 떠난 뒤 열 달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12월 7일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됨으로써 최대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을 맞아 제32~43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아버지 조지 부시, 빌 클린턴, 아들 조지 부시에 관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극보수적 언론재벌인 루퍼트 머독이 영국의 <더 타임스>를 인수한 뒤 진보적 성향이 더욱 돋보이는 <인디펜던트>의 이 특집은 오바마와 전임 대통령들을 비교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이 세계 제2차대전 이래 미국이 주도한 냉전과 신식민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유산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관한 좋은 자료로 보인다.


오바마가 주목한 레이건의 화법과 그 호소력 


<인디펜던트>의 2009년 1월 22일자 특집기사는 로널드 레이건을 이렇게 묘사한다.


  ‘현직에 있던 시절에는 인텔리겐차의 조롱을 받던 로널드 레이건’, ‘때로는 현대 미국 정치의 최악을 상징하는 듯이 보였지만’ ‘스크린 위의 매력을 가장 굳건한 자산으로 지닌 언변 좋은 대변인’


이런 레이건을 오바마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 나는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의 태도와 ‘아버지가 가장 잘 안다’는 식의 포즈, 일회성 정책, 그리고 빈곤층에 대한 이유 없는 비난 등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가 어떤 면에서 호소력을 발휘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레이건은 먼저 질서 확립을 바라는 미국민들의 강렬한 욕구를 건드렸다. 더 나아가 그는 우리가 분별없고 비정한 세력에 그냥 끌려 다닐 것이 아니라, 근면과 애국심, 책임감, 낙관적 태도, 종교적 신념과 같은 전통적인 미덕을 되살림으로써 개개인은 물론, 우리 모두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담대한 희망>, 54쪽)


1980년이면 오바마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때인데, 그 무렵 그는 벌써 레이건이 권위주의적이고 감성에 치우치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고 파악한 것이다. 그는 레이건의 가장 큰 장점으로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솜씨’를 들고 있다.


  내가 놀랍게 여긴 것은 당시 레이건이 개발해 그런대로 잘 먹혔던 정치방식이 아니다. 레이건이 활용했던 화법이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 입증된 사실이 놀라웠다. 4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1960년대의 격동과 그에 따른 반발이 계속 우리의 정치 담론을 이끌어 가고 있다. (위의 책, 55쪽)


오바마는 자신의 정치관과 이념, 철학, 포부 같은 것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이 책에서 레이건의 편집증적 이데올로기, 인명 살상을 서슴지 않는 ‘전쟁광’ 성향 같은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1980년 한국에서 일어난 광주 5월항쟁을 총칼로 제압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레이건이 그를 워싱턴으로 초청해서 어깨를 두드려 준 일을 오바마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길이 없다.

 

  이라크 전쟁 대물림 한 부시 부자

 

레이건 이후 오바마의 전임자들은 아버지 부시, 빌 클린턴, 아들 부시였다. 부시 부자는 극우보수적 이데올로기와 전쟁 일으키기에서 레이건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라크에서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1990년 8월 1일 이라크가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산유국인 이웃나라 쿠웨이트를 침략해서 합병하려고 하자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1924~   )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미국을 비롯한 34개국 연합군을 구성해서 쿠웨이트로 보낸다. 이것이 이른바 ‘걸프전’(이라크와 아랍의 다수 국가들은 ‘페르시아만 전쟁’이라고 부름)의 시작이다.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사들이 전투 장면을 스포츠처럼 생중계하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패트리엇 미사일 같은 최첨단 무기가 이라크 군인들과 전쟁 장비들을 ‘명중’시키면 어린이들이 그것을 대량 살육으로 보지 않고 컴퓨터게임처럼 즐기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라크군은 그야말로 ‘초전박살’을 당한다. 1991년 2월 28일에 전쟁은 이라크군과 사담 후세인의 일패도지로 끝나고 만다. 이라크의 사망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라크 당국은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했고, 20만 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당시 미 공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1만~1만2,000 명의 이라크 군인들이 공습을 받아 죽고, 지상전에서 1만여 명이 희생당했다고 한다. 다른 보고서를 보면 전사자 수치는 배로 늘고, 부상자는 7만5,000 여명이나 된다. 이에 비해 전투하다 죽은 미군은 148명, 전투 외의 사고사가 145명이었고, 영국 군인은 47 명이 전사했다.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미국 군수산업은 이득 얻고, 부시는 클린턴에게 패하고


그 전쟁에서 가장 신바람이 난 것은 미국의 군수산업 경영자들이었다. 의회가 산출한 미국의 전쟁비용 11억 달러 중 상당액은 무기상들의 금고로 들어갔을 것이다.


‘침략자이자 테러리스트’라고 낙인찍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을 궤멸시키다 시피한 부시의 인기는 엄청나게 치솟았다. 그러나 그는 1992년 대선에서 압승을 장담하다가 빌 클린턴에게 패했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가 치명타가 된 것이다.


아들 부시는 아버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군사력과 비용과 인명 살상에서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다. ‘제2차 걸프전’이라고도 불리는 이라크 전쟁은 2003년 3월 20일 대부분이 미국과 영국 군대로 이루어진 ‘다국적군’이 이라크에서 군사작전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전쟁의 명분은 이라크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대량살상무기(WMD)가 미국, 영국과 연합국들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유엔의 무기 조사관들은 WMD에 관해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전사자 4천여 명에 엄청난 전비 퍼붓고도, 테러근절은커녕


이라크 전쟁의 결과는 끔찍했다. 2008년 8월 9일 보도에 따르면 미군 전사자는 4,136 명이었다. 이라크 보건부는 2008년 1월, 이라크인 15만1,000여 명이 전쟁과 폭력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2007년 8월, 한 여론조사기관(ORB)은 전쟁과 테러로 이라크인 12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미국이 사용한 전쟁비용은 8,450억 달러로, 오바마가 경제 살리기에 쓰겠다는 액수와 비슷하다. 그리고 이라크 국민 470만여 명이 나라 밖으로 달아나고 200만여 명이 국내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


아들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전쟁이 거둔 열매는 무엇인가? 사담 후세인을 법정에 세운 뒤 처형하고, 이른바 ‘민주정권’을 세운 것인가? 요즈음에도 이라크에서는 미군과 반대 종파에 대한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부시는 테러를 뿌리 뽑기는커녕 미국민과 오바마에게 전쟁 뒤처리의 짐만 잔뜩 안긴 채 텍사스의 집으로 날아가 버렸다.


조지 부시 1세와 2세는 왜 그렇게 참혹한 전쟁을 일으켰을까? 원래 사담 후세인은 레이건에 이어 아버지 부시가 이란을 견제할 목적으로 키운 사람이었다. 아들 부시도 2001년 9월 11일 뉴욕 무역센터 폭파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후세인을 적대하지 않았다. 그가 2004년 11월의 대선을 앞두고 미국민들을 사로잡을 소재로 이라크전쟁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서 자주 첫 손가락에 꼽히는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정치· 사회· 문화· 국제 평론가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매서추세츠공대[MIT] 교수)는 개발도상국들의 독재자나 부패한 정치지도자들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아니 실컷 이용하다가 때가 되면 악용하는 레이건이나 부시 부자의 행태를  이렇게 지적한다.


  사담은 워싱턴 현직자들의 환호를 받은 유일한 괴물이 아니다. 이러한 괴물들 중에는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베베 독’ 뒤발리에, 니콜라에 차우세스쿠를 거론할 수 있다. 이들 모두는 그들의 운명이 끝나기 직전까지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체제 내부로부터 축출되었다. 미국의 현직자들에게 총애를 받은 또 다른 인물로는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하르토가 있는데, 그는 야만적인 면에서 사담과 경쟁상대라고 할 수 있다. 부시 1세 대통령의 백악관을 처음 방문한 외국 국가원수는 자이레의 모부투 세세 세코였는데, 그는 또 다른 제일급의 암살자이자 고문자이며 약탈자였다. 남한의 독재자들 역시 1987년의 민중운동에 의해서 군부통치-미국의 지원을 받은-가 궁극적으로 종식될 때까지 워싱턴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비중이 떨어지는 흉악범들까지도 그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기능을 잘 수행하는 한, 따뜻한 환영을 기대할 수 있었다. (노엄 촘스키 지음, 황의방· 오성환 옮김, <패권인가 생존인가-미국은 지금 어디로 가는가>, 2004년 11월, 까치, 141쪽)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전쟁을  마무리해야 하는 짐을 지고 있을 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계속되고 있는 싸움까지 떠맡았다.


아프간 전쟁, 아직도 끝나지 않아

 

아프간전쟁은 이른바 ‘제2차 걸프전’, 곧 아들 부시가 주동해서 일으킨 이라크전보다 두 해 앞서 2001년 10월 7일에 시작되었다. 그해 9월 11일에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비행기 자폭 공격을 받자 부시는 ‘테러에 대한 지구전쟁’을 선포한다. 미국은 아랍의 알카에다가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단정하고 그 조직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과 연계되었다는 추정만으로 탈레반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그 나라를 침공한다. 미국 국방부는 빈 라덴을 사살하거나 체포하지 못한 채 12월, 탈레반을 패배시켰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2003년 초 탈레반은 조직을 재편하고 병력을 강화하면서 미국의 영향 아래 세워진 ‘꼭두각시’ 정권을 위협한다. 아프가니스탄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는 탈레반을 제압하지 못한 부시는 2007년 3월 3,500여 명을 추가로 파병한다.


오바마 대통령 시대의 미국이 안고 있는 두 개의 전선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이고, 아프간과 인접한 파키스탄이 그 전선의 일각에 있다. 오바마는 최고통수권자로서 미군의 주요한 작전을 사전에 보고받거나 승인해야 하는데, 취임한 지 이틀 뒤인 1월 23일(한국시각)에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에서 미군의 첫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파키스탄 영토에 두 차례 미사일을 발사해서 외국인을 포함한 18명이 사망했다. 그 지역에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숨어 있다고 판단하고 미사일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된 지 이틀 만에 외국에서 미군의 인명 살상을 승인해야 하는 것이 오바마가 전임자한테서 물려받은 짐이다.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국외 여러 나라들에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개입했다. 특히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 정부들이 동유럽 전역과 아시아 일부 나라들에 들어서자,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공산화에 대한 공포가 극심해졌다. 그것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래 그들이 품어온 피해의식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참전해서 ‘추악한 전쟁’이라고 국제 여론의 비판을 받은 베트남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미국은 그 전쟁에서 참담한 결과에 부닥치자 어렵사리 발을 뺀다. 그 뒤 1989년의 베를린장벽 붕괴와 1991년의 소련 해체 이후에는 국가적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들에 무력으로 개입하거나 ‘테러와의’ 전쟁에 힘을 쏟는다. ‘세계의 경찰’과 ‘평화군’을 겸하겠다는 것이다.




 

글쓴이 / 김종철
· 전 동아일보사 기자
·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 전 연합뉴스 대표이사 사장
· 현 재능대학교 초빙교수
· 평론으로 <상업주의소설론> 등, 저서로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1922)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5), 역서로 <말콤 엑스>(공역,1978) <산업혁명사><프랑스혁명사>(1982) <인도의 발견>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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