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밖에도 킹은 1976년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서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2004년에 킹과 그의 부인은 미국의회 금장(Gold Medal)을 탔다. 킹은 ‘20세기에 가장 존경받는 인물’(갤럽 선정)에서는 2위였고, 시사주간지 <타임>의 여론조사에서는 ‘20세기의 인물’ 중 6위였다. 케이블텔레비전인 <디스커버리>와 인터넷 전문의 AOL이 ‘가장 위대한 미국인’을 뽑은 콘테스트에서는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730개 도시가 킹의 이름을 딴 거리를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 성공회와 루터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이런 킹을 왜 ‘오바마시대’에 다시 조명해야 하는지를 지금부터 여러 사실들을 바탕으로 알아보자. 내가 이번에 킹에 관한 자료들을 검색하면서 놀란 까닭은 부정적인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킹이 살아 있던 때에도 사후에도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표절’이었다. 다소 길지만 <위키피디아>의 ‘마틴 루터 킹 2세의 저작권 문제들’ 중 주요 부분을 여기 옮겨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겠다.
마틴 루터 킹 박사의 논문들이 그의 부인 코레타 스콧 킹에 의해 스탠포드대학교의 ‘킹 논문 프로젝트’에 기증되었다. 1980년대 말, 그 논문들을 분류해서 목록을 작성하던 프로젝트 담당자들은 킹의 보스턴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인 ‘폴 틸리히와 넬슨 위먼의 신 개념 비교’가 보스턴대에서 3년 전에 다른 학생(잭 부저)이 쓴 학위논문에 담긴 많은 부문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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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이 조직신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보스턴대의 조사 결과, 킹은 그 주제로 글을 쓴 여러 저자들의 논문에서 학위논문 주제의 주요 부분들을 표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킹 논문 프로젝트’에서 킹의 초년기 삶에 관한 연구를 지도한 민권운동역사가 랠프 E. 루커에 따르면, ‘대승불교의 주된 특성과 법리’라는 킹의 논문은 거의 전적으로 제2의 전거에서 베낀 것이었다.
마틴 루터 킹은 표절꾼?
주요 신문들은 그 사실을 알고도 한 해 넘게 보도를 하지 않았다. <위키피디아>의 글은 이렇게 계속된다.
이 사건은 1989년 12월 3일자 (영국의) <데일리 텔리그래프>에 프랭크 존슨의 기명기사로 보도되었는데, 제목은 ‘마틴 루터 킹-그는 표절꾼이었는가?’였다. 그 다음 1990년 11월 9일,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이 ‘킹 연구자들, 실망스럽게도 골치 아픈 패턴을 발견하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보스턴 글로브>와 <뉴욕 타임스>를 포함한 다른 신문들도 비슷한 내용의 보도를 했다. 많은 신문 사설들은 킹이 그런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위대한 사람이라면서 그를 옹호했다. (···)
보스턴대는 킹이 부적절한 행동을 했지만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여전히 학문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서 학위를 취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독자들은 무엇을 연상할까? 바로 우리나라에서 근래 몇 해 동안에 벌어진 일들일 것이다. 특히 정치인, 고위관리, 학자들이 표절이 발각되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총장이 되지 못한 사건들 말이다.
또 충격적인 사실은 킹의 그 유명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일부와 그 형식이 표절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마무리 구절이 아치발드 2세가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과 부분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이다. 두 연설 모두 새뮤얼 프랜시스 스미스의 인기있는 애국송가인 ‘나의 조국은 당신의 것입니다’의 첫 절을 반복하는 것으로 끝나며, 두 연설 모두 여러 산들 중 하나의 이름을 들면서 “자유여 울려 퍼져라”라고 노래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인용하고 보니 마틴 루터 킹의 이미지에 치명적 손상을 가하는 정보들을 소개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쩌랴. 그의 표절 또는 저작권 침해가 이것들로 끝나지 않으니 말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마틴 루터 킹 2세의 표절 페이지’(Martin Luther King Jr's Plagiarism page)가 나온다. 아직도 보완중이라는 이 페이지에는 킹의 ‘표절 조사 연대기’가 실려 있다. 대학 시절에 쓴 에세이들, 박사학위 논문, 저서들, 설교와 연설과 잡문으로 분류된 내용들이다. 이 페이지 작성자는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인지, 캐나다의 브리티시콜럼비아대학교가 표절 방지 대책을 세우면서 킹이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다른 사람의 저작을 대학 시절 논문에 도용한 것을 가장 심각한 표절의 예로 들었다고 소개한다.
자, 이런 사실들 중 다수가 사실로 입증되었다면(일부가 혐의에 불과하더라도) 킹이 생시와 사후에 받은 그 수두룩한 훈장과 명예,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인’ 칭호를 어떻게 할 것인가?
표절이나 스캔들 불문은 흑인들의 표 때문
킹은 표절 말고도 사생활이 스캔들로 얼룩져 있다는 비난을 자주 받았다. 그런 공격들 중에는 킹을 도청하거나 미행한 FBI 요원들이 언론에 제보한 것도 있고 킹의 측근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주장한 것들도 있지만, 그 내용이 너무 끔찍해서 여기에 열거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킹이 명백히 표절을 거듭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극우 보수세력의 최상층부에 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마틴 루터 킹 2세의 날’ 제정에 흔쾌히 동의했으며, 비슷한 성향의 공화당 상하원 의원들 다수가 법안에 찬성했을까? 그것은 철저히 정치적 계산의 결과였다. 흑인들의 우상이자 미국 시민으로서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는 킹을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는 기념일을 정하고 영원히 기리자는 법안에 반대하면, 유권자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흑인들의 표를 거의 잃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민주당이 그런 법 제정에 반대한다면 전통적 지지층인 흑인들이 등을 돌릴 것이 분명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크게 성장한 민권운동의 ‘대부’인 킹을 부정하면 많은 백인들의 지지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걱정도 컸을 것이다. 레이건도 아버지 부시도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도 하나가 되어, 킹의 표절이나 ‘문란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사생활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킹의 날’ 선포에 적극 찬동한 것은 그런 계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틴 루터 킹 2세를 미국의 우상(icon)으로 법제화하는 데 격렬히 반대한 이들은 제시 헬름스(1921~2008, 노스캐롤라이나주 정치인으로 1973년부터 2003년까지 연방 상원의원. 보수세력의 대표적 인물)를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 소수였다. 헬름스는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한 데다 부도덕한 성직자인 킹을 위한 기념일을 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상원이 법안을 승인하는 것을 막으려고 16일 동안 의사진행 방해(filibuster)를 했지만 공화당과 민주당 상원의원들의 압도적 지지에 밀려버렸다.
버락 오바마 역시 에드워드 케네디처럼 때와 쟁점에 따라 계산을 할 수밖에 없는 직업정치인이다. 그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 토마스 제퍼슨에 버금가는 지성, 에이브러햄 링컨의 포용력과 결단성, 테오도어 루스벨트의 통찰력과 추진력, 존 F. 케네디의 대중적 인기를 아울러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흑인 빈민지역에서 인권운동을 하다가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 되면서 그는 프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고, 연방 상원의원이 된 뒤에는 워싱턴에서 ‘정치공학’과 권력 다툼을 생생히 체험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제는 미국권력의 최정상인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니 아마추어적 진실성과 도덕성만으로는 국내 정치와 외교를 밀고 나갈 수 없으리라고 확신할 것이다.
오바마의 프로 기질, 배울 건 배우고 비판할 건 비판하고
만약 오바마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나는 조지 워싱턴이 연방 공직자 전체보다 많은 수의 노예를 소유한 대지주였는데도 그를 국부로 떠받들고 있는 미국이 부끄럽다”거나, “표절을 일삼고 사생활이 문란했던 마틴 루터 킹 2세를 위한 공휴일을 제정한 것은 미국민들과 세계를 기만한 일”이라고 공언했다면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5등 안에도 못 들었을 것이다.
오바마는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기 한 해 전인 2006년에 이미 킹에 대해 최상의 경의를 표한 바 있다.
그는 마침내 한 국가가 스스로 변화를 통해 그 신조의 의미를 지켜가며 살기 시작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오래 전에 모세와 마찬가지로 그는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산꼭대기에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킹 목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오래 동안 바라던 곳에 아직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념관을 세움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나은 곳이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딸들에게 킹 목사는 하느님께서 구하신 것을 행한 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아이들의 선생님과 역사책이 알려주도록 맡겨두겠습니다. (킹을 위한 기념식 연설에서)
2007년 12월 한국 대통령선거에서 전통적 ‘민주세력’이라고 자부하던 진영은 보수임을 공언하던 한나라당에 참패했다. 한 해 가까이 실의에 빠져 있던 야당과 많은 국민들은 오바마가 매케인에 압승하자 “한국에서도 ‘제2의 오바마’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피와 눈물로 이루어 온 민주화가 무너지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그런 구상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민주세력의 ‘재활’을 위해 오바마를 스승으로 삼고 싶은 이들은 그의 프로 기질을 냉정하게 인식한 뒤에 배울 것은 배우고 부정적인 면들은 비판적 시각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