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마침내 말콤이 무하마드와 결별하고 NOI를 떠나는 시간이 온다. 1963년 11월 대통령 케네디가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당하자 언론의 논평 요구를 받은 말콤이 ‘자업자득’이라고 대답한 것이 무하마드를 격분시켰다. 무하마드는 말콤에게 6개월 자격정지를 명한다. 결별의 더 결정적인 원인은 무하마드의 간음과 사생아였다. ‘무하마드가 개인 비서들과 간통해서 잇따라 임신하게 했다’는 교단 안의 소문을 믿으려 들지 않던 말콤은 오랜 번민 끝에 당사자들을 만나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하고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받고 ‘이슬람 국가’를 떠난다. 이밖에도 그가 무하마드와 결별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세계적 스타’가 된 말콤에 대한 무하마드 자신과 교단 간부들의 질시와 모함이었다.
목숨을 바칠 각오로 열중했던 ‘이슬람 민족’ 운동을 떠난 말콤 엑스는 말할 수 없는 고뇌에 빠져 있다가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하지’(순례)를 떠난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여러 인종의 무슬림들과 대화하고 기도하면서 ‘백인은 악마’라는 고정관념을 떨쳐버린다.
여기 이 고대의 성지, 아브라함과 마호멧 및 성서에 나오는 그밖의 모든 선지자들의 고향에서 피부색과 종족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것만큼 진지한 환대와 참된 형제애의 정신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지난 주일 동안 내내 나는 ‘온갖 피부색의 사람들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친절을 목격하고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넋을 잃을 정도였다. (<말콤 엑스> 하권, 207쪽)
그는 이때부터 수니파(시아파와 함께 이슬람의 양대 교파)로 개종하면서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라는 아랍식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한다.
말콤은 메카 순례 이후 행동반경을 넓혀,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흑인의 단결과 우애, 모든 인종의 평화공존을 강조한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결기구(Organization of Afro-American Unity, 약칭 OAAU)의 의장으로서 아프리카 단결기구(OAU)와 연대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한다.
아직까지 의혹인 비극적 암살, 제발 다시는 없길
마침내 운명의 날이 온다. 1965년 2월 21일 말콤 엑스는 뉴욕 맨해튼의 오듀번 볼룸에서 열린 OAAU의 모임에서 연설하고 있었다.
“(···) 앞줄의 사나이 세 명이 벌떡 일어서서 말콤 엑스를 겨냥하고 일시에 총을 쏘아댔어요. 그것은 마치 총살집행장면 같았어요.”
말콤 엑스는 그를 명중시킨 열여섯 발의 총알 중 첫 알을 맞는 순간 한 손이 가슴 위로 내려졌다. 다음 순간 다른 한 손이 위로 치켜 올려졌다. 그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은 총탄에 아스라졌으며 그의 턱수염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는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그의 거대한 몸집이 뻣뻣하게 뒤로 넘어지며 의자 둘을 쓰러뜨렸다. (<말콤 엑스> 하권, 351쪽)
미국 경찰은 ‘검은 이슬람교도’ 세 명을 체포했는데, 당연히 ‘1급살인’으로 사형을 당했어야 마땅한 그들은 20여년 남짓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났다. 그러나 말콤 엑스의 사후 지금까지 미국에서는 국가 정보기관이 암살에 간여했으리라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장면을 다시 읽으면서 ‘해방공간’의 혼란기에 암살당한 백범 김구 선생과 몽양 여운형 선생을 연상했다.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도 생각났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2008년 미국 민주당 에비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이기기를 은근히 바랐다. 부시를 반드시 눌러야 세계가 훨씬 더 편안해질 텐데, 오바마가 후보가 되면 인종주의자들과 극우보수세력의 암살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들 부시가 임기 8년 동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목숨을 잃게 한 그 많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부시의 길을 따를 가능성이 큰 존 매케인의 당선은 막아야 할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2000년에 앨 고어가, 2004년에 존 켈리가 패배함으로써 미국에는 끔찍한 역사의 퇴행이 나타났다. 한반도에서는 더 앞당겨질 수도 있었던 북한의 개방이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같은 보수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극우에 가까운 보수가 집권하면 그토록 파괴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과 세계 양심세력의 기대에 맞게 대통령이 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가 말콤 엑스처럼 무방비 상태로 비극적 최후를 맞지 않고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면서 4년, 또는 연임한다면 8년 임기를 무사히 마치기를 바랄 뿐이다.
말콤 엑스가 암살당한 1965년에 오바마는 네 살이었다. 그러니 그가 말콤의 죽음을 알았을 리가 없다.
검은 피부 때문에 오바마도
오바마의 첫번째 저서이자 자서전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보면 그는 말콤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검은 피부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인종 차별을 괴로워하면서 방황과 탈선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마약중독자, 뽕쟁이. 흑인 청년인 내가 가고자 하는 최종적인, 그리고 치명적인 기착지가 그것이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녀석이었는지 증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쨌거나, 적어도 내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들과 내 마음속 풍경들을 지워버리고 또 내 기억의 못난 것들을 지워버릴 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술에 취한다는 것이 백인 친구의 반짝이는 새 자동차 안에서, 혹은 학교 땡땡이치고 나와 말썽 일으킬 게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는 하와이 원주민 아이들 몇몇과 해변에 앉아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과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위의 책, 174~5쪽)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술과 마리화나에 빠지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마약인 카페인이나 헤로인에는 손을 대지 않고 인생 초년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오바마가 그렇게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에게 확실한 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지성과 진취성을 아울러 갖춘 어머니가 방황하는 아들을 끈질기게 설득해서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옥시덴탈 칼리지에 진학시킴으로써 그는 흑인청년으로서는 쉽지 않은 엘리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말콤 엑스가 중학교 2년을 마치고 범죄와 방탕의 수렁으로 떨어진 것과는 정반대이다.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며 위기 극복한 오바마
오바마의 더 확실한 뿌리는, 비록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하버드대에서 공부하는 길을 택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모국인 케냐로 돌아가서 공직생활을 한 아버지였다.
옥시덴탈 칼리지 2학년을 마친 오바마는 뉴욕시의 콜럼비아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다. 미국 뉴잉글랜드의 아이비리그 8개 대학 중 한 곳에 들어간 것이다. 지금도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서 입학하려고 한다는 바로 그 대학에. 대학을 마치고 시카고의 빈민지역에서 일하던 오바마는 법률전문가가 될 필요를 느끼고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 지원해서 합격한다. 피부가 희지 않고 앵글로색슨족이 아니라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와스프에 못지않은 엘리트의 요건을 갖춘 것이다.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가기 전에 케냐를 방문한다. 그때는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아버지인 버락 오바마 1세는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큰 집과 큰 차를 갖고 풍족한 생활을 하다가 관광부 장관이 되었으나 조모 케냐타 대통령과의 불화 때문에 해임당하고 ‘백수’가 된다. 빈민가의 허름한 집에 살다가 케냐타가 죽은 뒤 재무부장관이 된 아버지는 그 자리를 물러난 뒤 마지막 몇 해를 비통함과 후회 속에 살았다고 한다.
오바마는 할머니에게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 또한 아홉 살에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으며 10대 시절에는 그 아버지의 난폭한 성격 때문에 피나도록 맞고 버려졌음을 알게 되었다.
(·····)
그렇게 무덤 옆에 서서 오바마는 자기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알고 이해했다고, 그리고 용서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담하게도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꿈과 희망-버락 오바마의 삶>, 스티브 도허티 지음, 김혜영 옮김, 2008년 3월, 송정문화사, 151, 153쪽)
오바마는 아버지의 고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대통령후보로 나서면서 ‘버락 후세인 오바마’라는 이름이 득표에 불리함을 알면서도 고수하는 동기가 되었다.
오바마, 고교시절쯤 말콤 엑스 자서전을 읽어
오바마가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읽은 것은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인 것 같다. 그는 ‘흑인은 왜 차별을 당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시절에 관해 이렇게 썼다.
말콤 엑스만이 포기하지 않은 듯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포기한 곳에서, (···) 오바마는 말콤이 구원으로 가는 자신만의 길을 발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말콤마저도 그의 깊고 깊은 고통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할 수 없었고, 그의 찢어진 상처를 치료해줄 수 없었다. “그는 그가 한때 가졌던 바람, 그 안에 흐르는 흰색 피, 폭력행위(강간)에 의해 얼마간 닦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에 관해 이야기했다.” (위의 책, 116쪽)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오바마가, 말콤이 ‘이슬람 국가’를 탈퇴하고 ‘백인은 악마’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미국 흑인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인들의 화합과 단결을 위한 지도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오바마가 직접 쓴 책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는 말콤 엑스에 관한 내용이 간략하게 나올 뿐이다. 그는 시카고에서 흑인 빈민들을 위해 일하던 시절 루이 패러칸(일라이자 무하마드의 후계자)이 이끄는 ‘이슬람 연합’이 흑인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도 독선과 세속적 천박함과 상업주의에 빠진 것을 보고 실망하던 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말콤 엑스의 손에서는 혁명적이었던 것, 예컨대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이, 말콤 엑스가 뿌리를 뽑자고 힘주어 외쳤던 바로 그 대상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환상, 또 하나의 위선이 생겨난 것이었다. 행동에 나설 수 있는 또 하나의 핑계가 생긴 것이었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341~2쪽)
오바마가 서른네 살에 초판을 낸 이 책에서 말콤 엑스를 ‘백인 배척주의자’ ‘실패한 혁명가’로 판정한 시각은 그 뒤에도 바뀐 것 같지 않다. 오바마가 연방 상원의원 시절인 2006년에 낸 두 번째 저서 <버락 오바마-담대한 희망>(홍수원 옮김, 2007년 7월, 랜덤하우스코리아)에는 말콤 엑스에 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