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지 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트레킹은 히말라야 일대의 산기슭을 전문 산악인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걸어서 여행하는 방식인데 산이 없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하이킹과 등반의 중간 단계이고 대체로 하루 12-20km씩, 해발 5천 m 이하를 걷는 것을 가리킨다.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강행군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차림으로 적당한 거리를 걷고 숙소에서 편히 쉬는 것이 트레킹의 좋은 점이다.
두 발과 두 눈의 자유의지에 따라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 트레킹의 기본 개념이다. 천천히 걷다보면 부질없는 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때로는 침묵 속에서 소중한 성찰에 도달하기도 한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순례 같은 것이다.
천천히 걷다보면 부질없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래서 트레킹을 도보순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산티아고 트레킹은 스페인 북서부의 기독교 성지 산티아고를 찾아가는 도보순례인데 최근에는 종교에 관계없이 수많은 일반 도보여행자들이 참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세한 여행정보와 여행기를 담은 책과 인터넷 카페가 인기를 얻고 있다.
국내의 트레킹 코스로는 지리산길이 실상사와 벽송사 근처의 일부 구간만 개통되었는데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내 경험으로는 네팔의 안나 푸르나 코스보다 지리산길이 더 편안했다. 8백리 지리산길이 열리면 순례여행자들의 행렬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을 것이다.
올 겨울에는 제주도의 올레길을 걷고 싶다. ‘올레’란 제주말로 고샅을 뜻하는데, 성산 일출봉 근처에서부터 11개 구간이 개통되어 제주의 바다와 마을, 돌담, 오름을 천천히 걷는 길이다. 젊은 시절 고은 시인이 제주도의 풍광과 술에 취해 걷던 길이려니 짐작할 뿐이다. 제주도에 사는 친구는 군데군데 시멘트로 포장된 올레 길 말고 해안을 따라 걷자고 제안한다.
지난 여름에는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서귀포의 강정 마을 사람들이 제주 해안길을 따라 도보순례를 했다고 한다. ‘평화의 섬’ 제주를 위해서는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느니, 지역 발전을 위해서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느니 하는 개발론자들과 안보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은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는 주장처럼 어불성설이다. 억지 논리를 펴는 그들부터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욕심을 비웠으면 좋겠다.
이런 억지가 어디 서귀포 해군기지 뿐인가. 경인운하나 4대강 대운하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은 걷기를 싫어하는 모양이다. 지하 벙커에서 속도전을 외치는 사람들이니 30년 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쌀로 밥을 짓듯 대구 지방에서 회자되는 우스개소리에 ‘심조불산 호보연자’라는 법문이 있다. 30년 면벽 수행을 마친 스님이 먼 산을 바라보더니 구름 같이 모인 신도들에게 입을 열어 ‘심조불산 호보연자’라고 일갈했다. 신도들이 이게 무슨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머리를 조아리는데, 한 꼬마가 스님이 바라본 먼 산을 가리키며 ‘산불조심 자연보호’하고 외치더란다. 30년 전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구호를 써붙였던 것이다.
팔공산 오도암 터에서는 이곳에서 수행했다는 원효 스님의 법문이 도보순례자들을 타이른다. “지혜로운 이가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자가 하는 일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