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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제가의 유배생활

문근영 2018. 8. 8. 01:22

제121호 (2008.12.26)


박제가의 유배생활


김 문 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조선후기의 중국통 학자로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박제가(1750~1805)가 먼저 생각난다. 박제가는 조선에서 파견된 연행사(燕行使)의 일원으로 네 차례나 북경을 방문하여 유명한 학자들과 친분을 나누었고, 이 때 보고들은 것을 바탕으로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여 중국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사회 제도를 개혁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또한 그는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되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와 같은 국가적 편찬 사업에 참여하면서 학문적 역량을 발휘했고, 시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었다.


정조가 죽은 후,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함경도에 유배되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한 이후 박제가에게는 위기가 닥쳤다. 그는 1801년에 북경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경도 종성 땅으로 유배되었는데, 사돈인 윤가기가 시국을 비판하는 흉서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뚜렷한 혐의가 드러나지 않자 유배형에 처해졌다. 1803년에 조정에서는 박제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처분을 내려졌지만 현지에서 시행되지 않았고, 1804년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박제가는 1805년에 사면까지 받았지만 그 다음 달에 사망하고 말았다. 56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였다.


박제가의 유배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을 앓으면서 함경도 변방의 척박한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유배지에 머무는 동안 둘째 누님이 병으로 사망하는 슬픔을 맞았다. 그러나 뛰어난 학자인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은 볼 만한 서적과 제대로 된 문방구를 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박제가는 이웃에 사는 초시에 막 합격한 진사에게서 『규장전운(奎章全韻)』과 사서(四書)를 빌려 볼 수 있었고, 주약조(朱若祖)란 사람이 향교의 서적을 관리하게 되자 그를 통해 삼경(三經)의 대전본(大全本)을 구해볼 수 있었다. 박제가는 몇 번이고 집에 있는 『주자전서(朱子全書)』나 경서의 주소본(注疏本)을 떠올렸지만 수십 책에 이르는 무거운 책을 유배지까지 옮길 방법이 없었다. 어렵게 구한 서적을 읽게 되자 기록하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이제는 종이와 붓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박제가는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붓과 먹, 줄이 쳐진 공책을 보내라고 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문의 원대한 포부를, 그러나 서적도 문방구도 부족해


외롭고 고단한 유배생활이었지만 박제가는 13경(經)을 연구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다. 자기 평생에 그처럼 한가한 시간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송·원대 주석이 수록된 대전본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을 종이에 기록해 두었고, 종이가 일정한 분량이 되면 집으로 보내 자식들에게 깨끗이 필사해 두도록 했다. 그때그때 주소본을 보면서 자료를 보완하고 싶었지만 후일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사서에 대한 연구가 마무리되자 그는 저술의 이름을 ‘사서정설(四書 說)’이라 했고, 얼마 후에는 ‘사서지설(四書只說)’로 바꾸었다. 사서가 끝나자 『예기』와 『시경』의 연구로 들어갔다. 그러나 『예기』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의례』와 『주례』를 겸해서 보아야 했고, 『시경』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주소본을 보아야 했다. 서울에 있는 서적을 그리워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박제가의 13경 연구가 어느 정도로 진행되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유배지의 정황을 보여주는 편지는 여기에서 끝나고, 박제가는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 후 사망했기 때문이다. 박제가의 유배생활을 생각하면 척박한 환경에서 학문에 몰두하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기본이 되는 서적조차 구하지 못해 답답해하는 모습이 못내 안타깝다. 같은 시기에 정약용은 ‘조선은 서울에서 수십 리를 벗어나면 황량해진다’고 했는데, 서적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당시의 형편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라 생각된다.


(박제가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정민·박동욱이 역주한 『아버지의 편지』에 나온다.)


 


글쓴이 / 김문식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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