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부의(賻儀) / 최영규

문근영 2018. 7. 12. 07:56

부의(賻儀)

최영규




봉투를 꺼내어
부의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 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 움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 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 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니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 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놓았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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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규 / 강원도 강릉 출생. 경기대 경제학과 졸업.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아침시집』.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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