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05년 시와시학 가을문예 당선작
2005년 시와시학 가을문예 당선작
김혜경·이서현·한길수
전어 (외 4편)
김혜경
전어 몸에 기름이 돌고
사람들은 가을을 씹는다
매암섬 밑
수천 마리 물고기떼 붙은
자루가 발견되었다
살이 다 차지도 않은 어린 가리비처럼
열려 있는 소녀의 젖
전어 몸보다
가시가 더 많은 세상
우리가 발라내야 할 살의 무게는
자루 한 자루
어미의 통곡 소리
파도에 부딪혀 갈라지고
현장 수사 끝낸 형사들
선창에 앉아 매운 양념 소주
전어무침을 오독오독 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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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라 그랑드 자트 섬 뜨거워진 돌 위를 걷는다 따가운 햇빛이 지나간 몽돌도 그림 속도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원주민인 듯한 하얀 모자를 쓴 소녀가 따라온다 햇빛이 무수한 칩을 길 위에 꽂는다 우린 햇빛이 가르쳐 주는 길을 따라 메타쉐콰이어 나무 사이를 달리고 있다 한 마리의 개와 여섯 마리 나비가 날아오른다
한 여름 오후, 시간조차 느리게 바다 위를 지나간다 이 곳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일까 아무 것도 들킨 것 없다는 듯 햇빛은 긴 장침을 코코넛 잎사귀에 놓는다 곧 빠져나가는 파도 속을 길게 찌른다 굽어진 코코넛 나무 그늘에 누워 물기를 말리던 나는 모래 속에 꽃대를 밀어 올린 민해당처럼 헛기침을 자꾸만 한다 소녀가 약초를 건넨다
온 몸에 파란 반점이 생긴다 내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진 그림처럼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안료가 들뜨고 일어난다 소녀의 눈부신 하얀 모자도 빛깔을 잃는다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해풍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다 세차게 바람이 또 분다 코코넛 열매가 두두둑 떨어진다 내가 웨하스 부스러기처럼 바람에 흩어져 버린다
* 조르주 피에르 쇠라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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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열쇠
―한마음회관 화장실에서 보다
아주 예쁜 똥 한 덩이 있다
연노랑 색깔로 뭉쳐진
나는 이 똥의 주인을 알고 싶다
어쩜 이렇게 귀여운 똥을 만들 수 있는지
그의 식탁 내력을 보여주는 열쇠다
그는 생강나무 그늘에 앉아 생강만 먹는
고집 센 벌은 아닐까
아님 산수유 꽃그늘에 취해 하루종일
바람에 날개 흔들리는 참알락팔랑나비이거나
무당벌레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혹 애기똥풀을 닮고 싶어하는 달맞이꽃이거나
살랑대는 바람은 아니겠지
나는 한 무더기 똥을 내뱉기 위해 새벽마다 끙끙댄다
그것들은 깊이 파묻혀 잘 열리지도
간혹 어렵게 나온 것들은 내 좁은 學門을 찢고 나온다
단단한 고집으로 뭉쳐진 시커먼 사고뭉치들!
반짝반짝 변기 속에서 빛을 내는 순한 똥 덩이,
이 예쁜 열쇠를 놓고 간 주인은 이미 집을 찾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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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리 쑥부쟁이
선창 끝에 파도가 쭈그리고 걸려 있다
바람이 작은 게를 낚시에 끼운다
파도도 물살 다듬으며 낚시를 한다
꼬물대며 미끼에 걸려든 문어
노인의 익숙한 손놀림
찰칵 마을의 내력을 찍어 인화하는 햇볕
문어는 먹이를 놓지 않으려다
그만 다리 하나를 잃고 물 속으로
파아파아 헤엄쳐 간다
노인은 한참동안 문어가 간
주름 깊은 물길을 쳐다본다
오랫동안 창을 갈지 않은 집
덜컥덜컥 깨진 창 바람이 비릿하다
어둠이 석간 신문을 펴면
하얀 쑥부쟁이 물안리 구석구석
숨겨진 기사를 복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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獄生이 삼촌
沕岸里가 죽었다
사십 년간 사공이던 삼촌의 집으로
사람들과 바닷물 들락거렸다
물살들이 마당에 들어와
신발이 해초처럼 떠다녔다
혼인하던 날 심었던 참소나무
삼촌의 소망만큼 뿌리 내리지 못했다
바람난 숙모가 떠난 후 친구는 달빛 바다였다
손가락으로 삼촌은 물살을 갈랐다
그것은 바다에게 말을 거는 것
수많은 플랑크톤이 기억을 출력했다
삼촌이 마지막으로 노를 젓던 밤,
밤바다는 고요했다
갯바람에 흔들리던 참소나무,
모래밭에 솔가리를 던졌다
헛숟가락질하던 삼촌,
칠천연육교 개통 하루 앞두고
끝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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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1967년 거제 출생. 경남대학교 교육원 시 창작반 재학중. 1998년 「소년문학」동화 당선. 겨울숲 동인. 한마음회관 글짓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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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외 4편)
이서현
1
돈내코를 지나 산길을 달립니다 달리는 도로 위로 각시붓꽃잎 혀를 내민 야생노루가 뛰어 달아났습니다 한 쌍의 산 꿩도 날아올랐습니다
한라산 오르는 숲길 비바람에 굳은살 박힌 발뒤꿈치로 걸어 들어가 새겨진 나이테의 무늬들을 모두 다 말해 줄 수 없을 때 나무들 잎으로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달구지풀 바람에 고개 흔들리고, 따뜻했던 봄날의 햇볕시간도 기억하며 나무들 흙에 뿌리 묻고 숲 속을 향기로 풋풋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숲의 숨결을 맡으며 산을 오르고 내리는 많은 발걸음 그림자 속에도 찍혀 있는 호호 호오 교오굑 하늘 향해 고개를 쳐들고 신나게 소리지르는 제주 휘파람새 소리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모든 시름의 세포들 한라산 화살촉 꽃 모양의 구름체꽃 위에 눕힙니다
2
한라산 1600 고지 돌매화나무 하얀 꽃, 바위에 나를 듯 하얀 꽃잎을 펼친 것은 새가 아닙니다
바늘 엉겅퀴꽃 피어 있는 구릉, 고요가 흐르다 넘어질 하얀 거미줄이 쳐 있습니다
보고 싶었던 백록담 짙은 구름에 가려 눈에 잘 보이질 않습니다 윗세오름에 앉아 입산이 금지되어 백록담에 오르지 못한 아쉬운 등산객들 산 정상이라도 바라보고 싶어해도
아, 백록담엔 비바람과 안개가 구름에 가렸다 걷혔다 하며 사람들에게 쉽게 그 모습 잘 보여주질 않습니다 그러나 고산지대 바람과 화산재 속에서도 잔뿌리 가득 키 낮게 매발톱꽃, 흰그늘용담, 솜다리, 섬바위장대, 흰땃 딸기, 하얗게 수줍게 흔들리며 하늘에 바람 시린 이마 스치고 있나요?
꽃 흔들리며 바라보자 모슬포 저 먼바다 수평선이 기우뚱 기울었다 다시 솟아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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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꽃물이 밀물져 오는 여름저녁 무렵엔
장독대 언저리에도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분꽃
밤에 피는 분꽃이 저녁 화단을 환하게
등불 밝히고 서 있을 때
날송편 같은 흰 버선코의 옥양목 버선을 신으셨던 할머니는
빨갛고 탐스러운 봉숭아 꽃잎만 골라 따
이파리 몇 개 넣고 백반이나 소금을 넣어 찧은 뒤
아주까리 잎으로, 하얀 명주실로 꽁꽁 묶어
봉숭아 꽃물을 곱게 들여 주셨습니다
손녀딸의 손톱마다에
안개 추억의 실루엣이 흔들려
25년이 지난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도 만조로 밀려오는 저녁 답
밤하늘에서 소금별들이 하얗게 쏟아져 들어올 때
그 쏟아지는 별빛을 소금으로 찧고 빻아
손톱 끝에 봉숭아 꽃물을 들입니다
할머니가 봉숭아 꽃물을 들여주셨을 때처럼
지금도 물들인 손톱을
흐르는 냇가의 맑은 물 속에
담그면
바람 꽃 흔들리듯이 물이랑 흔들리며
물 속에서 봉숭아가 손톱마다에 송이송이 환하게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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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앞마당 복사꽃잎
비바람에 날려날려
대청 마루에
하얗게 빨갛게
강아지 흙발자국도 병아리 발작도
드문드문 찍히고
삽, 괭이 들고 들어서는
등 굽은 아버지 사립문 여는 소리에
몸 누이고 세상 재던 자벌레 놀라
후다닥!
의문부호처럼 몸 일으키는
복사꽃 나무의
초록벌레
한 마리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복사꽃
꽃잎 꽃잎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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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란에는
밤새 분홍 목단 꽃향기가 일렁이는
뒤란에
몇 개의 수줍은 별이
어제 내린 독 안의 빗물 위에서 깜빡
깜빡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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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장마가 이어지고 있는 오늘, 그 날의 추억이 감자를
파실파실하게 찌게 할 것 같습니다.
개강하던 날 복도 끝에서부터 달려와 “선생님” 하며 포옹하던
그 친구가 생각납니다.
‘감자꽃’의 권태웅 연구논문을 썼던 조카 또래의 젊은 친구 수정.
내 책꽂이에도 있었던 감자꽃…
예비논문 발표 날 긴장 풀어 주냐고, 옆에서 감자꽃 이쁘다고 나도 좋아한다고 했던 기억들.
그런데 갑자기 오늘 그 감자꽃이 보고 싶어집니다.
텃밭에
장마철에 빗방울 이슬처럼 매달고
가지꽃 같은
연보랏빛 감자꽃이 피었을 때
장마 비 개이면
투망 들고 물고기 잡으러 갑니다.
이슬 같은 빗방울 매달고
마구간 지붕 위에 핀
박꽃 같이
하얀 감자꽃이 피었을 때
개울가
송아지 선 채로 풀 뜯는 어미소 젖꼭지를 빱니다.
쪼르륵 쪼르륵 빈창자를 타고 들어가는 배고픈 오후 햇살이
언니 동생 나에게 감자를 까게 했으므로
우리들은 얼굴에 감자 녹말이 터 하얬고
감자를 까던
할아버지 제사상 시접에 놓여있던
놋숟가락은 반달모양으로 닳아만 갔습니다.
이서현 경기도 양평 출생. 경희대 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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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사막을 벗지 않는다 (외 4편)
한길수
수천 년 전의 눈발 날리던 아마르고사*
혹한에도 연명하는 풀들이 몸을 굴린다
사는 건 처음부터 목숨 건 투쟁이었을 것
모래바람 속을 떠도는 울분의 씨앗은
백 번 죽어 화려한 변명이 되고 말뿐
풀조차 神이 선택한 운명의 등고선이라면
늙은 하이에나의 울음 같은 낮은 목소리로
눈물가슴 한 골짜기를 비워두자
태양의 저주로 버림받았던 사막을 위해
간절한 기도로 창세기의 하루를 빌려오자
사막이 된 바다의 전설을 지도에서 찾는다
불황의 뼈들로 삶은 폐타이어처럼 굴러다니고
가시가 된 아홉 시 뉴스가 귓속을 파고든다
끈질긴 생의 뒷골목 구차한 사랑조차
낙타에겐 단벌 멍에의 옷이 아니던가
물기 없는 저 구릉(丘陵)의 건조한 씨알 하나가
마지막 남은 목마른 소망이 될지라도
살을 태우는 사막의 하얀 밤을 갈고 갈아
싯퍼렇게 날 세우고 싶다
*아마르고사 ;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의 산맥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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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국집에서
평생,
가을 들판보다 더 누런 외투 입고
세월을 되새김질하는 소를 본다
볏단이 작두날을 받으며 여물이 될 때
"게으른 사람은 죽어 소 된다"
소가죽 땀 흘리던 주름진 할아버지,
생애 가득 곡간에 여물들 쌓아두셨다
어젯밤,
날 찾아 온 한 마리 소
기억의 비 쏟아지는 들판 거닐다
웃돌게 자란 푸념의 잡초를 밟는다
술병들 사이 빈 잔 꾹꾹 채우며
"한형, 시골 가 농사나 지었으면 좋겠어"
파삭 삭은 얼굴 나를 앞에 두고 있다
술잔에 어리는 오래된 야망 굳어져
구겨 넣듯 창자의 벽 넘어가면
그렁그렁한 눈에 새벽 비 쏟아지겠다
우거지 세상을 살다 응고된 혈액
숭숭 구멍난 혈관을 통과하는 의식
덜 깬 취기가 선지처럼 부서진다
"김형, 열심히 선지 먹고 소 되자고"
소 된 할아버지 들판에 서 계시고
싱싱한 풀밭 같은 아침을 열어
팔짱끼고 걷는 두 사람의 네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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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흔적
강이 보이는 풀숲에 서서
어둠보다 먼저 일어나는 안개를 본다
초겨울 성난 노을도
안개의 발에 걸려 기우뚱거리고
마른 강아지풀에 걸려 흔들리기도 하고
더러는 어두워진 하늘을 기억하기도 한다
해의 단단한 오기조차
안개에 드러눕는다
강바닥에 침몰한 일출을 끌어올리고
저마다 걸어왔던 자리로 떠난다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침
목젖에 걸린 네 이름이 선명하다
널 닮은 그리움으로 방울진 안개가
내가 걸어온 풀숲 길을 향해
수직선을 그리며 하나씩 떨어진다
안개는 안개를 끌어안아도 적어 보이듯
내 속에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밤사이 가슴앓이 흔적들이 사라지고
풀숲도 지쳐 말없이 강을 보고 있다
안개에 젖지 않은 바람
아무도 모르게 수평선 너머로 떠밀며
오래지 않은 기억의 싱싱한 언어를 토하자
침몰하는 것은 언어만이 아니라는 듯
속도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낙하한다
안개 자신도 말들의 받침을 따라
강물에 뛰어들어 점점 가라앉는다
강이 보이는 풀숲에 서서
어둠보다 먼저 일어날 안개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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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風磬) 2
입은 있으나 귀가 없어 듣지 못하는 물고기
소리가 듣고 싶어 어둠 속에 비늘을 벗고
스러진 바람을 막아내자 제 몸은 지치고
수심을 알지 못해 물 여러 곳을 헤매었지만
강도 바다도 끝내는 땅과 맞닿는 것을
서로에게 칼날 세우는 일들
보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아
한번도 눈감아 본 적 없지만
보이는 그대로 담아두기는 슬픔도 크다
아픔들을 차마 볼 수 없어 鐘을 눌러쓴
세상에 배대고 지느러미로 하늘을 난다
너의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마음을 비우라고 더 크게 소리내는
스스로 종지기가 되어도 즐거운 물고기
사악한 욕심 버리고 하산하는 가엾은 주인
현암사에는 하늘을 강이라 말하는 물고기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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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대한민국 마흔 두 살의 이씨가
무거운 생의 옷을 벗어 던지고
지하철 2호선 선로위로 뛰어들었다
아들을 얻었다고
어머니 이마에서 솟구치던 기쁨의 땀방울
섬광처럼 빠르게 철길을 건너갔다
부정 타지 말라고 새끼줄에 붉은 고추를 달았겠지
누구에게 갚을 빚으로 마지막 희망을 저당 잡힌 걸까
서툰 걸음으로 여기까지 걸어와서
오 년 노숙생활로 국숫발처럼 빚더미만 불어터지고
남대문 새벽시장의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유언 대신 더듬거리며
태어나려고 악착같이 잡았던 탯줄을 놓았다
탯줄 같은 세상의 손잡이를 놓아버렸다
명품 광고판 아래 거적도 깔지 않고 잠든 그의 꿈 자락
검붉은 선혈이 낭자하게 스며든다
쉬쉬 어깨너머로 눈살을 찌푸리고 가는 발길들
던지고 가는 말의 화살들이 고막을 찌른다
나비가 되어 훨훨 나르려는
고치집 속에 갇힌 누에 같은 세월
종두소리를 내며 떠나가고 있다
내 나이 마흔 셋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전철이 지연된 시간은 오직 십 분이었다
한길수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 행정학과 휴학. 2001년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가작. 현재 미주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과 4학년 재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