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병 욱(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청록집>(1946년 출간)은 한국시사(韓國詩史)에 한 획을 그은 시집이다. 일제에 빼앗겼다 되찾은 모국어에 향토적 서정미와 민족전통을 실어 내놓아 “말라붙은 겨레의 심정을 적셔준(김춘수)” 단비라는 평가를 받았다. 재작년 시집 발간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유종호도 “<청록집>은 우리 문학의 정전중 하나”라며 “고향과 자연, 행복을 분리하지 않은 청록파 세 시인의 작업은 지금 우리가 새롭게 음미해야할 대목”이라고 찬미한 바 있다.
해방 후 처음 나온 본격시집으로 매진을 거듭했던 그 책은 그러나 비난도 적잖게 받았다. 주장만 가득한 구호(口號) 시를 즐겨 쓰던 이들이 선봉에 섰다. 그들은 조지훈과 박목월이 일찍이 편지로 시를 교환해 농하며 가다듬은 저 유명한 시구(詩句)를 걸고 넘어졌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박목월, ‘나그네’ 일부)과 ‘나그네 긴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놀이여’(조지훈, ‘완화삼’ 일부)를 들먹이며 “지금 인민들은 독립을 달라, 쌀을 달라 아우성인데 밀주가 익는 강마을이나 찾아다니는 시인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며 소리를 높였다.
좌익 이념에 사로잡힌 비난에 조지훈이 분반했다 고통 받고 억압받는 시기, 민중의 삶을 외면한 생활이 없는 시란 얘기였다. 딱딱한 구호성 이념에 젖은 그들에겐 술과 강과 노을을 노래한 시인이 시대의식도 없고 그저 밀주에 취해 쏘다니는 한량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런 시가 인민들에게 읽힌다면 인민 또한 의식도, 목적도 없이 허허롭게 사는 삶에 안주하고 말 것이라며 걱정했을 법도 하다.
주로 좌익시단에서 그런 비난이 거세지자 조지훈은 마침내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참으로 분반(噴飯)하였다.” … 입속에 든 밥을 내뿜을 정도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시를 시로 읽지 않고 이념이니 목적에 끼워 맞추려고 같잖은 주장을 해대는 행태에 헛웃음 외에 무슨 대꾸가 필요하냐는 거였다. 그러면서 그는 “전쟁 중에도 아기는 태어나듯 암흑의 계절에도 방랑은 있다”며 생활을 정치적 경제적이나 물질적인 것으로만 재단하려는 비판자들을 몰아쳤다.
<청록집> 후 60여년이 지났다. 그런 요즘, 참으로 분반할 일이 민주화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국방부가 장병들의 정신전력을 저해할 소지가 있는 책 23권을 '불온서적'으로 지정, 장병들의 접근을 봉쇄한다는 얘기다. 불온서적 중에는 출간 후 50만권이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과 세계적 석학과 각종 독서단체가 추천한 필독서도 포함돼 논란을 증폭시킨다. 작가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와 석학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 인들> 등이 그런 책들이다.
국방부의 금서 지정과 판매량 급증도 분반할 일 국방부는 반정부 반미(反美) 반자본주의적 시각에서 쓴 책이나 북한 찬양 서적을 장병들로부터 차단하는 건 당연하다는 입장인 것 같다. 과연 그 책들이 그러하냐는 차치하고 보자. 그렇더라도 60년 전 좌익시인들이 청록파에게 왜 같은 구호를 외치지 않느냐고, 자기들의 가치에 동화되지 않느냐고 비난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세상을 하나의 시각으로만 보고 남들마저 그 틀 속에 가두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 행태를 어찌해야 좋을까. 현기영이 오죽하면 “도대체 지금 내가 어디에 살고 있나 싶어요”라며 쓴웃음을 지었겠는가.
장병 금서(禁書) 명단이 보도된 뒤 그 책들의 판매량이 갑자기 늘어난 건 또 한번 분반할 일이다. 그러잖아도 OECD 국가 중 국민 독서율이 가장 낮다는 오명을 듣는 우리나라니 이렇게라도 책 판매가 느는 걸 좋아해야 할까. 아니면 상당수 유명작가들이 왜 내 책은 불온서적으로 지정하지 않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현실을 낄낄 웃어야할까. 삼키기도 전에 밥을 모두 뿜어내는 일이 더는 없어야할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