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먹고 사는 일에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수염이 세 자라도 먹어야 산다”라는 속담은 그 점을 명확하게 증언해줍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먹고 사는 일, 즉 요즘말로 ‘경제’라는 말인데, 어떤 선비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느니, ‘오동의 열매가 아니면 봉황은 먹지를 않는다’라고 말하며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고달프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큰 갓에 넓고 큰 도포를 입고 점잖만 뺀다고 선비일 수 없다는 생각을 철저하게 지닌 분들이 이른바 실학자들이었습니다.
실학자의 대표격이던 다산은 ‘치생지술(治生之術)’, 즉 먹고 살아갈 방법에 눈감은 선비란 선비일 수 없다고 하면서 중국의 사마천이라는 역사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참다운 선비란 학문과 도덕에도 뛰어나야 하지만 아울러 치생지술에도 등한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늘 가난하고 천하면서 인의(仁義)를 말하기 좋아한다면 역시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다”(長貧賤如語仁義 亦足羞也)라는 말을 인용하고는, “소보(巢父)나 허유(許由)의 절개도 없으면서 누추한 오막살이에 몸을 감추고 명아주나 비름으로 배를 채우며, 부모와 처자식을 헐벗고 얼며 굶주리게 하며, 친구가 찾아와도 술 한 잔 권할 수 없으며, 명절에도 처마 끝에 걸려 있는 고기는 보이지 않고, 유독 공사(公私)의 빚 독촉하는 사람들만 대문을 두드리며 꾸짖고 있으니, 이는 천하에 가장 졸렬한 짓으로 지혜로운 선비는 하지 않을 일이다”(爲尹輪卿贈言)라는 격담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선비는 마땅히 생활의 수단을 강구해야하느니, “원포(園圃)와 목축(牧畜)만한 것이 없다”라고 단정하면서 자세한 설명을 했습니다. “진귀한 과일을 심는 곳을 원(園)이라 이르고, 맛좋은 채소를 심는 곳을 포(圃)라 이른다”라고 말하고 목축이야 가축을 기르는 일임은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산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주곡인 쌀과 보리만 주식으로 여겨 그것만을 농사라 여기며 집중하던 시절에, 원포에 특용작물의 재배를 장려하고, 목축업의 중요함을 특별히 강조한 실학자였습니다.
이제는 다산의 농업진흥책도 별 효과가 없을 것만 같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농민들의 삶입니다. 쇠고기까지 대량으로 수입이 허용되었으니, 목축업에서 무슨 이익이 나겠습니까. 이래서 선비는 또 계속 가난하게만 살아가야 할 판이니 다산은 또 얼마나 탄식을 연발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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