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6호 연필 / 유미애

문근영 2018. 3. 17. 10:09

6호 연필

 

   유미애

 

 

 

바깥귀를 접은 지 오래 나는 나를 완성시킬 수 없네

위대한, 설산의 구두소리는 내 것이 아니고

신문지에 스케치한 카카리키*는 나의 나무에 도착하지 않았네

하지만 너라는 그림자는 뜻을 굽힌 적이 없지

캄캄한 그 혀 속으로 휘파람 한 토막을 건네줄게

벌거벗은 음들이 서로의 무늬를 섞을 때

마침내 내게도 객관적인 입술이 생기는 거야

붉은 달을 부르는 순간 네 안의 짐승이 깨어날 거야

피투성이의 등을 문대던 꽃나무와

떠꺼머리 굴 한 채가 너에게 속하게 되겠지

노래를 멈추지 마, 해진 자켓이 갈기를 세울 때까지

날마다 초췌해지는 내 몸의 얼룩들을 가져가

바닥과 바닥의 심장을 관통해온 이 눈물을 마셔

필갑을 열면 검은 밀림이 타오르는 밤

네 눈 속, 두 번째 달이 둥글어질 때

가라 표범

성대가 녹아내릴 때까지 변방을 달려

휘파람도 불 수 없는 밤

국적 없는 네 울음소리가 또 다른 너에게 가 닿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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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시사사》2015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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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애 / 1961년 경북 문경 출생. 2004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손톱』.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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