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명륜동 / 최하연

문근영 2018. 3. 17. 09:47

명륜동

 

  최하연

 

 

 

 

탱자나무 울타리엔 살진 참새가

언덕 위 히말라야삼목의 가지 끝엔

야뇨를 겪는 늙은 하늘이

 

아무 곳으로나 갈 수 있지만

아무 곳은 어느 곳에도 없어서

그냥 앉아 있다

 

대략은 비어 있다

허공의 나머지는 노랑인

삼거리의 늦가을을 바라보며

까마귀가

전봇대 끝에 앉아 운다

 

비로소 피곤하다

구름은 낮고

밥집은 배고픈 사람을 기다리겠지

 

이번엔 계단 위로

투명한 하늘이 한 토막

놓인다

택배처럼

 

아픈 고양이와 모퉁이를 지키는

빈 캔이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는 하루

 

배가 나온 참새들이 탱자나무 위에 앉아

서로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풍경 속으로

 

까마귀가 운다

검게 운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까마귀는 목젖으로 울고

첫 몽정

첫 자위

기억을 더듬어보면

마지막 사정은 언제가 될까

 

파란 비닐을 뜯어놓고

노란 종이 박스를 접는다

 

 

 

                       —《현대시》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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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연 / 1971년 서울 출생. 2003년 《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피아노』『팅커벨 꽃집』.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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