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국경 너머의 잠 2 / 유정이
문근영
2018. 3. 17. 09:47
국경 너머의 잠 2
유정이
네 시가 지나면 마른 빨래들이 돌아왔다
바람의 기별을 하나씩 개켜 두는 동안
구부정한 저녁이 처마 밑으로
마른 흙 툭툭 털며 들어섰다
밤은 낮게 내리깔리고 나는 값을 지불하듯
하나씩 세어보던 초록 잎사귀를
검은 하늘에 떨어뜨렸다
마술처럼 어둠의 장막을 지나면
세 부분으로 나눠진 내가 꺼내질지도 모른다
다른 나로 태어날 수 있다면!
이마를 긁적이면 생각을 잠그고 있던
독수리가 튀어나왔다 골목에 세워두었던 그림자는
푸드득 날아가고 없다
검은 유리창에 찍힌 새의 손바닥
온전히 바닥을 짚었던 없는 기억은
목구멍에 걸린 이름처럼 덜그럭거린다
헛바퀴 돌던 마음은 낙타가 피우는 먼지에 가 쌓이고
나는 사막을 모포처럼 뒤집어쓰고 잠든다
당신이 그리웠으나
몸에 돋는 나이테 떼어 베개 아래 숨겨놓고
길게 발가락을 늘여본다 엄지발가락 끝으로
잔뿌리들 우지직거리며 태어나는 소리
환한 모래 불어가는 국경 너머로 내일은
우편배달부 같은 바람이 손을 잡아끌 것이다
—《시산맥》201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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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이 / 1963년 충남 천안 출생.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내가 사랑한 도둑』, 『선인장 꽃기린』.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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